본문으로 이동
메뉴 여닫기
환경 설정 메뉴 여닫기
개인 메뉴 여닫기
로그인하지 않음
지금 편집한다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될 수 있습니다.

김홍집(金弘集, 1842~1896)은 개항기의 온건 개화파 관료로, 1880년 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가서 『조선책략』을 들여왔고, 1894~1895년 총리대신으로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이끌었으나 1896년 아관 파천 뒤 군중에게 죽임을 당했다.

김홍집

북촌 재동에서 박규수와 이웃해 살며 그의 사랑방에 드나든 것으로 보이는 개화파 1세대이다.[1] 급진 개화파와 달리 중도 개혁 노선을 지킨 온건 개화파였다.

수신사와 개화 정책

편집 원본 편집
  • 2차 수신사(1880) - 인천 개항, 공사 주재, 관세 문제를 풀려고 58명을 거느리고 일본에 갔다. 수입품에 5% 관세를 매기는 안을 냈으나 일본이 응하지 않자, 뒷날 높은 세율로 교섭하는 편이 낫다고 보고 청 외교관 황쭌셴의 『조선책략』과 정관응의 『이언』을 얻어 돌아왔다. 『조선책략』은 정부가 개화 정책과 미국과의 수교로 나아가는 데 영향을 주었으나, 1881년 영남 만인소 등 위정척사 운동을 불러 김홍집은 유생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떠난 달을 『신편 한국사』는 5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해관」 항목은 7월로 적는데, 음력과 양력의 차이로 보인다.[2][3]
  • 통리기무아문 - 1880년 말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자 통상을 맡는 당상경리사가 되었다.
  • 조약 실무 -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 1883년 영국·독일과의 조약, 임오군란 뒤의 제물포 조약과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에서 전권 부관으로 협상 실무를 맡았다.
  • 갑신정변 수습 -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좌의정 겸 외무 독판으로 1885년 초 일본과 한성 조약을 맺었다.[2]

갑오·을미개혁

편집 원본 편집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뒤 군국기무처가 세워지자 총재관이 되어 제1차 갑오개혁을 이끌었다. 과거제 폐지, 은 본위 화폐 제도, 도량형 통일 등 약 210건의 개혁안을 처리했다. 이어 박영효와의 연립 내각에서 홍범 14조를 반포하고 제2차 개혁을 추진했다. 1895년 을미사변 뒤 다시 내각을 이끌며 단발령·태양력 사용·'건양' 연호 같은 을미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아관 파천으로 내각이 무너지자 '왜대신'으로 몰려 광화문 앞에서 군중에게 맞아 죽었다.[2]

개항기 인물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활동 인물
북학 사상을 이어 통상 개화론 주장 박규수
2차 수신사로 『조선책략』을 들여옴, 갑오·을미개혁 내각 총리 김홍집
보빙사(민영익·홍영식·서광범)로 미국에 다녀옴 유길준은 수행원 (→ 보빙사)
『서유견문』 저술, 미국 유학 유길준
영남 만인소를 이끎 이만손 (→ 영남 만인소)
  1. ↑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신편 한국사』 38 개화와 수구의 갈등,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
  2. ↑ 2.0 2.1 2.2 김홍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
  3. ↑ 해관의 설치(1882∼1883), 『신편 한국사』 38 개화와 수구의 갈등,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