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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사(修信使)는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뒤부터 주일 공사를 두기 전까지 조선이 일본에 보낸 외교 사절로, '옛 우호를 닦고 신의를 두터이 한다'는 뜻이며 1876년 김기수, 1880년 김홍집, 1881년 조병호, 1882년 박영효 등 모두 네 차례 파견되었다.

1876년 1차 수신사로 일본에 간 김기수

1876년 2월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을 맺은 뒤 일본 측은 조선에 사절 파견을 요청했다. 의정부는 일본 사신이 온 것이 우호를 위한 것이었으니 우리도 사신을 보내 신의를 보여야 한다며, 사신의 이름을 '수신사'로 하고 응교 김기수를 뽑자고 아뢰어 허락을 받았다.[1] 처음에는 옛 통신사처럼 답례 성격이 강했으나, 차츰 통상 문제 협상과 정치적 사건 수습을 맡는 사절로 성격이 바뀌었다.[2]

  • 1차(1876, 김기수) - 76명의 일행 대부분이 악공·나팔수 같은 의례 인원이어서 통신사의 연장으로 여긴 모습을 보였다. 4월 부산에서 일본 기선을 타고 떠나 도쿄에 20일 머물며 일본 왕과 정계 인사를 만나고 일부 근대 시설을 둘러본 뒤 6월 1일 복명했다. 김기수는 견문록 『일동기유』를 남겼다.[2]
  • 2차(1880, 김홍집) - 1876년 조일 무역 규칙으로 무관세 무역이 허용되어 쌀이 대량으로 빠져나가자 관세 설정과 쌀 수출 금지를 협상하고, 인천 개항 요구에 대응하려고 파견되었다. 협상은 성과가 없었으나, 김홍집은 청 외교관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가지고 돌아왔다.[3] 『조선책략』의 유포는 위정척사파의 거센 반발을 불렀지만, 통리기무아문 설치·조사 시찰단 파견·미국과의 수교 방침 등 개화 정책에 활용되었다.[2]
  • 3차(1881, 조병호) - 35개 조의 통상 장정안을 가지고 관세 협상을 시도했으나 일본이 위임장이 없다는 이유로 응하지 않았다.[4]
  • 3차의 사정 - 처음에는 김홍집이 다시 정사로 임명되었으나 유생들의 공격과 대원군의 압박으로 사양해, 보수파 조병호가 대신 갔다.[2]
  • 4차(1882, 박영효) - 임오군란을 수습하려고 보낸 사절로, 공식 이름은 '특명 전권 대신 겸 수신사'였다. 제물포 조약과 조일 수호 조규 속약을 비준하고 배상금 문제를 처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정사 박영효, 부사 김만식, 종사관 서광범 등이 갔고 민영익·김옥균도 동행했다.[2]

개항기 외교 사절단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절단 때 파견국 내용
1차 수신사 1876 일본 김기수, 『일동기유』
2차 수신사 1880 일본 김홍집, 『조선책략』 들여옴
조사 시찰단 1881 일본 박정양 등이 비밀리에 정부 기관·산업 시설 시찰
영선사 1881 청 김윤식, 톈진에서 근대 무기 제조 기술 학습 → 기기창
보빙사 1883 미국 민영익·홍영식, 조미 수교 뒤 답례
  1. ↑ 『고종실록』 13권, 고종 13년 2월 22일, 김기수를 수신사에 임명하다,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2. ↑ 2.0 2.1 2.2 2.3 2.4 수신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3. ↑ 『고종실록』 17권, 고종 17년 9월 8일, 수신사 김홍집이 일본에서 《조선책략》 1책을 증정하므로 가지고 귀국하다,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4. ↑ 조일통상장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