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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르트 도굴 사건은 1868년(고종 5) 독일 상인 오페르트 일행이 충청도 덕산에 있는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려다 실패한 사건으로, 남연군 묘 도굴 사건이라고도 한다.

충청남도 예산의 남연군 묘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는 1866년 두 차례 조선 해안에 와서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뒤 병인박해를 피해 조선을 빠져나온 프랑스 선교사 페롱 등과 손잡고, 남연군의 유해와 부장품을 손에 넣어 흥선 대원군과 통상 협상을 벌일 압박 수단으로 삼으려 했다. 미국인 젠킨스가 자금을 대고, 조선인 안내자와 유럽·필리핀·중국 선원 등으로 도굴단을 꾸렸다.[1]

  • 상륙 - 1868년 음력 4월 18일(양력 5월 10일) 증기선이 홍주 행담도에 정박하고, 작은 배로 덕산 구만포에 올라왔다.
  • 관아 습격 - 군복을 입고 총칼을 든 100여 명이 덕산 관아에 들이닥쳐 무기를 빼앗고 건물을 부수었다. 이어 마을에서 호미와 괭이를 빼앗아 가동의 남연군 묘로 갔다.
  • 도굴 실패 - 밤새 무덤을 팠으나 무덤 구덩이가 단단해 관에 이르지 못했고, 날이 밝자 이튿날 새벽 구만포로 돌아가 배를 타고 떠났다.[2]
  • 영종도 - 돌아가는 길에 영종도에 들러 대원군에게 협상을 요구하는 글을 전하려 했으나, 영종 첨사 신효철은 도굴 행위를 꾸짖고 글을 돌려보냈다. 이때 상륙한 일행 가운데 일부가 조선군의 공격으로 죽었다.

덕산 군수의 첫 보고는 이들을 '러시아(아라사) 군대'라고 적었고, 백과사전은 도굴단을 140명으로 적어 실록의 '100여 명'과 다르다.

  • 조정은 홍주 목사 한응필을 보내 묘소를 살피게 하고, 이 일에 천주교도가 끼었다 하여 천주교 탄압을 한층 강화했다.
  • 조상의 무덤을 파헤친 일은 유교 사회에서 큰 충격이었다. 서양에 대한 반감이 크게 높아졌고 흥선 대원군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굳혔다. 이는 1871년 신미양요 뒤 척화비 건립으로 이어졌다.
  • 젠킨스는 미국에서 고발되었고, 페롱은 프랑스 정부의 소환을 받았다.[1]

흥선 대원군 집권기 서양과의 충돌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건 때 나라·내용
병인박해 1866년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신자 처형
제너럴 셔먼호 사건 1866년 미국 상선이 평양 대동강에서 불탐
병인양요 1866년 프랑스, 정족산성 전투, 외규장각 도서 약탈
오페르트 도굴 사건 1868년 독일 상인, 덕산 남연군 묘 도굴 시도
신미양요 1871년 미국, 광성보 전투, 척화비 건립
  1. ↑ 1.0 1.1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고종실록』 5권, 고종 5년 4월 21일, 덕산 군수 이종신이 러시아 군대가 남연군의 묘소를 침범한 정황을 보고하다,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