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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심덕(尹心悳, 1897~1926)은 일제 강점기의 성악가로, 서양 성악을 정식으로 배운 첫 세대 소프라노로 이름을 떨쳤고 1926년 「사의 찬미」를 녹음한 직후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져 세상을 떠났다.

윤심덕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 여자 고등 보통학교와 경성 여자 고등 보통학교 사범과를 마쳤다. 관비 유학생으로 도쿄의 우에노 음악 학교(도쿄 음악 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했다.[1] 유학 중이던 1921년 동우회 순회 극단에 참여하며 목포 출신 극작가 김우진과 알게 되었다. 1923년 6월 귀국해 서울 종로 중앙 청년 회관에서 독창회를 열어 성악가로 데뷔했고, 서양 음악을 제대로 배운 성악가가 드물던 때라 단숨에 인기를 얻었다.[2]

  • 성악가 - 풍부한 성량과 당당한 무대 매너로 서울의 음악회마다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정통 성악만으로는 생계를 꾸리기 어려워 음악 교사로 일하며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가벼운 세미클래식을 부르기도 했다.
  • 배우 - 신극 단체 토월회에 들어가 무대에 섰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2]
  • 음반 녹음 - 1926년 여름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의 닛토(日東) 레코드에서 음반을 녹음했다. 녹음한 곡 수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윤심덕' 항목이 24곡, 같은 사전의 '사의 찬미' 항목이 처음 계획한 10곡에 「사의 찬미」를 더한 것으로,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이 11곡으로 전해 서로 다르다. 이때 남긴 「사의 찬미」가 그의 대표곡이 되었다.[2][1]

1926년 8월 3일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오는 관부 연락선에 김우진과 함께 탔다가 가명으로 유서를 남기고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 김우진은 아내와 자식이 있는 몸이었고, 두 사람의 사랑은 당시 사회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 사건이 크게 보도되면서 허무와 염세를 노래한 「사의 찬미」 음반이 날개 돋친 듯 팔렸고, 한국에서 유성기 음반과 유행가가 대중에게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2]

일제 강점기 대중문화 인물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인물 분야 대표 활동
윤심덕 성악·대중가요 「사의 찬미」(1926)
나운규 영화 「아리랑」(1926) 각본·감독·주연
이애리수 대중가요 「황성 옛터」(1932)
이난영 대중가요 「목포의 눈물」(1935)
방정환 아동 문학 잡지 『어린이』, 어린이날 제정
  1. ↑ 1.0 1.1 한국의 서양음악가: 성악가,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위키문헌 수록본, 2026-10-19 확인.
  2. ↑ 2.0 2.1 2.2 2.3 윤심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