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메뉴 여닫기
환경 설정 메뉴 여닫기
개인 메뉴 여닫기
로그인하지 않음
지금 편집한다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될 수 있습니다.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로, 충선왕이 원의 수도 연경에 세운 만권당에서 원의 학자들과 교유했고 공민왕 때 재상으로 개혁을 이끌며 성리학 수용과 고려 한문학 발전에 큰 몫을 했다.

이제현 초상(국보, 국립중앙박물관)

본관은 경주,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 시호는 문충이다. 아버지 이진이 과거로 출세하면서 가문이 일어섰다.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에 장원하고 같은 해 과거에 합격했으며, 『사서집주』를 펴낸 학자 권보의 사위가 되었다. 고려에 성리학을 들여온 백이정의 제자이기도 하다.[1]

원 무종 옹립에 공을 세워 원 황실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충선왕은 왕위를 충숙왕에게 넘긴 뒤 연경의 사저에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책을 즐겼다. 충선왕은 "원의 서울에 있는 문사들은 모두 천하에서 뽑혔는데 내 곁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며 1314년(충숙왕 1) 이제현을 불렀다. 이제현은 그곳에서 조맹부·원명선 등 원의 이름난 학자·문인과 어울리며 학문을 넓혔다.[2] 함께 어울린 인물로 『고려사』는 요수·염복·원명선·조맹부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조맹부·원명선·장양호·우집 등을 든다.

  • 충선왕을 대신해 서촉의 아미산에 제사하러 가고(1316), 강남의 보타사 행차를 따르는(1319) 등 중국 내륙을 세 차례 여행했다.
  • 1320년 충선왕이 참소를 받아 토번으로 유배되면서 원 생활이 끝났다. 1323년 다시 원에 가서 고려에 원의 성(省)을 세우려는 입성 책동에 반대하는 글을 올리고, 충선왕을 풀어 달라는 운동을 벌였다.

공민왕 때의 활동

편집 원본 편집
  • 충목왕 즉위(1344) 뒤 판삼사사가 되어 정치 기강을 바로잡는 개혁안을 냈다.
  •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도첨의정승이 되어 국정을 총괄했고, 이후 네 차례 재상에 올랐다. 1353년 지공거가 되어 이색 등을 뽑았다.
  • 1356년 기철 일파를 제거한 반원 개혁 직후 문하시중이 되어 사태를 수습했다. 딸은 공민왕의 비(혜비)가 되었다.
  • 역사 - 민지의 『본조편년강목』을 고치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 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만년에 백문보·이달충과 기전체 국사를 쓰려 했으나 마치지 못했다.
  • 저술 - 문집 『익재난고』 10권과 수필집 『역옹패설』 2권이 전하며, 둘을 합쳐 『익재집』이라 한다. 『역옹패설』은 조적의 난 뒤 은거하던 때에 썼다.
  • 문학 - 역사를 소재로 한 영사시가 많고 사(詞)에 뛰어났다. 이색은 묘지명에서 그를 "도덕의 으뜸이요 문장의 종장"이라 했다.[1]

고려 후기 학자와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활동 인물
만권당에서 원 학자와 교유, 『역옹패설』, 공민왕 때 재상 이제현
충렬왕 때 성리학을 처음 소개, 섬학전 설치 건의 안향
이제현의 문인, 공민왕 때 성균관 대사성으로 성리학 진흥 이색
『삼국사기』 편찬, 묘청의 난 진압 (고려 중기) 김부식
『삼국유사』 편찬 (승려) 일연
  1. ↑ 1.0 1.1 이제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고려사』 권110 열전23 제신 이제현, 충선왕이 이제현을 만권당으로 불러들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