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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一然, 1206~1289)은 고려 후기의 선종 승려로, 몽골 침입과 원 간섭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단군의 고조선 건국 이야기와 불교사·민간 설화를 모은 『삼국유사』를 지었고 충렬왕 때 국존에 올랐다.

일연의 사리를 모신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탑

처음 이름은 견명(見明), 자는 회연(晦然)이었다가 뒤에 일연으로 고쳤고, 호는 목암(睦庵), 시호는 보각(普覺)이다. 경주의 속현이던 장산군(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출신이며, 성은 김씨로 알려졌으나 비문 연구에서 전씨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나왔다. 인각사 비문은 경주에서 태어났다고 적었다.[1] 제자 죽허가 왕희지의 글씨를 모아 새긴 인각사의 비(1295)에 생애가 적혀 있는데, 원 간섭기라 '국사' 대신 국존(國尊)이라 불렀다고 밝혀 두었다.[2]

  • 출가 - 1219년 설악산 진전사로 출가해 구족계를 받고 여러 선문을 돌며 수행했다. 1227년 승과의 선불장에 장원으로 합격했다.
  • 몽골 침입기 - 비슬산 보당암에서 참선하다 1236년 몽골이 쳐들어오자 무주암으로 옮겨 깨달음을 얻었다. 1249년부터 3년가량 남해 정림사에 머물며 남해 분사대장도감의 대장경 판각에 참여했다.
  • 원종 때 - 1261년 원종의 부름으로 강화도 선월사에서 설법하며 지눌의 법을 이었다. 이후 오어사·인홍사에 머물렀다.
  • 운문사와 『삼국유사』 - 충렬왕 때인 1277년부터 1281년까지 청도 운문사에 머물렀는데, 이 무렵 『삼국유사』를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본다. 1281년 경주에 온 충렬왕을 만나 몽골의 병화로 불탄 황룡사를 보았다.
  • 국존 - 1283년 국존으로 책봉되었다. 노모를 모시려 고향 가까이로 내려갔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조정이 수리해 준 군위 인각사에 머물다 1289년 입적했다.

『중편조동오위』, 『조파도』, 『대장수지록』, 『선문염송사원』 등 100여 권을 지었다고 하나 지금은 『중편조동오위』, 『삼국유사』, 「인천보감후지」만 전한다. 『삼국유사』에는 단군 신화를 비롯해 지금은 사라진 고기·사지·비문을 인용한 고대의 역사와 문화 자료, 향가 14수가 실려 있다.[1]

고려의 승려와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활동 인물
『삼국유사』 편찬, 충렬왕 때 국존 일연
교장 간행, 해동 천태종, 주전도감 설치 건의 의천
수선사 결사, 정혜쌍수·돈오점수 지눌
유불 일치설, 『선문염송집』 혜심
법화 신앙을 바탕으로 백련 결사 요세
삼국 시대 승려 전기 『해동고승전』 각훈
  1. ↑ 1.0 1.1 일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군위인각사보각국사탑비, 고려시대 금석문·문자자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