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메뉴 여닫기
환경 설정 메뉴 여닫기
개인 메뉴 여닫기
로그인하지 않음
지금 편집한다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될 수 있습니다.

장보고(張保皐, ?~846)는 신라 하대에 완도에 청해진을 세우고 남해의 해상권을 쥐어 당·신라·일본을 잇는 무역을 이끈 인물로, 본래 이름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이다.

섬 출신의 미천한 신분으로, 젊어서 당에 건너가 서주 무령군의 군중소장이 되었다. 당시 중국 동해안 곳곳에는 신라방·신라촌을 이루어 사는 신라인이 많았고, 해적이 신라 해안의 주민을 잡아다 노비로 파는 일이 잦았다. 828년(흥덕왕 3) 귀국한 그는 왕의 허락을 받아 군사 1만 명으로 완도에 청해진을 세우고 청해진 대사가 되었다. 청해진 대사는 신라의 관직 체계에 없던 특별한 직함이었다.[1]

  • 해적 소탕 - 청해진을 근거로 해적을 몰아내고 남해와 황해의 바닷길을 장악했다.
  • 국제 무역 - 당에는 견당매물사가 이끄는 교관선을, 일본에는 회역사를 보내 무역했다. 개인 상인이 아니라 독자 세력으로서 사절을 보낸 것이다.
  • 법화원 - 당 산둥반도 문등현 적산촌에 절 법화원을 세워 그곳 신라인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일본 승려 엔닌은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법화원과 장보고의 도움을 기록했다.
  • 통일 신라의 무역항 - 당으로 건너가는 길목인 당항성(지금의 화성)과 서남해의 영암, 동해안의 울산항이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했다. 울산항에는 아라비아 상인도 드나들었다.

왕위 다툼과 죽음

편집 원본 편집
  • 신무왕 옹립 - 836년 왕위 다툼에서 밀린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피신해 왔다. 838년 희강왕이 죽고 민애왕이 즉위하자, 장보고는 군대를 보내 민애왕을 몰아내고 839년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세웠다. 그 공으로 감의군사가 되고 식읍 2천 호를 받았다.
  • 딸의 왕비 책봉 무산 - 신무왕의 아들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둘째 왕비로 맞으려 했으나, 조정 신하들이 바다 섬사람의 딸은 왕실의 배필이 될 수 없다며 막았다.
  • 반란과 피살(846) - 이에 원한을 품고 청해진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조정이 보낸 옛 부하 염장에게 암살당했다. 851년 청해진은 폐지되고 주민은 벽골군(김제)으로 옮겨졌다.

장보고의 활동은 신라 하대에 중앙의 통제가 약해지고 지방 세력이 군사력과 경제력을 키워 가는 흐름을 보여 준다.

신라 하대의 사건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연도 사건
822년 김헌창이 웅천주에서 반란 (→ 김헌창의 난)
828년 장보고, 청해진 설치
839년 장보고의 도움으로 신무왕 즉위
846년 장보고,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피살
894년 최치원, 시무 10여 조 건의 (→ 최치원)
  1. ↑ 장보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