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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화(楮貨)는 닥나무 껍질로 만든 종이(저지)에 찍은 지폐로, 고려 공양왕 때 처음 발행이 추진되었고 조선 태종 때 사섬서를 두어 본격적으로 발행했으나 널리 쓰이지 못했다.

고려 후기에는 원 간섭으로 은이 빠져나가고 원의 지폐인 보초가 들어왔으며, 은병 제도가 무너지고 품질이 낮은 추포가 돌면서 화폐 질서가 크게 어지러웠다. 원의 힘이 약해지며 보초의 가치도 떨어지자 공민왕 때부터 새 화폐가 논의되었다. 공양왕 때 방사량과 도평의사사의 건의로 자섬저화고를 두고 송의 회자와 원의 보초를 본떠 고려통행저화를 찍어 오종포와 함께 쓰게 하려 했으나, 1392년 4월 심덕부·배극렴 등의 건의로 자섬저화고를 없애 통용되지 못했다.[1] 『신편 한국사』는 이 저화 정책을 공양왕 3년(1391)의 일로 적었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방사량의 건의를 '1390년(공양왕 3)'으로 적어 서기 연도가 어긋난다.[2]

조선 태종의 저화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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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섬서 설치(1401) - 태종 1년 4월 좌의정 하륜의 건의로 저화제를 시행하고 이를 맡을 관청 사섬서를 두었다. 이듬해 1월 저화 2,000장을 처음 발행했다.
  • 가치와 강제 통용 - 저화 1장을 오승포 1필 또는 쌀 2말로 정하고, 오승포의 사용을 금지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명목 화폐를 믿지 않아 포를 다시 함께 쓰게 했고, 1403년(태종 3) 9월 사섬서를 없애며 저화를 멈추었다.
  • 재발행(1410) - 태종은 저화를 멈춘 것이 잘못이었다며 다시 발행하게 했다. 쌓아 두었던 '건문 연간' 저화에 '영락' 연호를 찍어 내고, 포의 사용을 엄하게 금했다.[2]
  • 규격 - 저주지와 저상지로 만든 두 종류가 있었다. 저주지 저화의 너비를 『신편 한국사』는 1척 4촌으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4치로 적었다.

저화는 크기와 종이 때문에 쓰기 불편하고 작은 거래에 맞지 않아 가치가 계속 떨어졌다. 세종은 1423년 동전 조선통보를 주조해 함께 쓰게 했고, 1425년에는 동전만을 법화로 삼기도 했다. 『경국대전』에는 포와 함께 나라의 화폐로 실렸으나 지켜지지 않았고, 16세기 초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1]

우리나라의 화폐와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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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시기
건원중보(철전) 고려 성종(996)
해동통보·삼한통보, 은병(활구) 고려 숙종 (→ 주전도감)
저화 고려 공양왕 때 추진, 조선 태종 때 사섬서에서 발행
조선통보 조선 세종(1423)
상평통보 조선 숙종(1678) 법화로 유통
당백전 흥선 대원군(1866) (→ 경복궁 중건)
  1. ↑ 1.0 1.1 저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
  2. ↑ 2.0 2.1 (1) 화폐 유통정책의 추진 경위, 『신편 한국사』 24,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