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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중건(景福宮重建, 1865~1868)은 흥선 대원군이 왕실의 권위를 세우려고 임진왜란 때 불타 270여 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던 경복궁을 다시 지은 사업으로, 비용을 대려고 원납전을 거두고 당백전을 찍어 백성의 원성을 샀다.

경복궁 중건 비용을 마련하려고 찍은 당백전

경복궁은 1395년(태조 4) 한양 천도와 함께 세운 조선의 법궁이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탔다. 그 뒤 창덕궁이 법궁 노릇을 했고, 순조·헌종 때 다시 지으려는 논의가 있었으나 재정 때문에 이루지 못했다.[1]

1865년(고종 2) 4월 2일 수렴청정하던 대왕대비(신정 왕후)가 경복궁은 나라를 세울 때 처음 지은 정궁인데 전란으로 불타 다시 짓지 못했다며 중건을 명했고, 이튿날 영건도감이 설치되었다.[2] 사업은 흥선 대원군이 직접 지휘했다.

  • 원납전 - '스스로 원해서 바치는 돈'이라는 뜻이다. 4월 5일 대왕대비는 이틀 사이에 원납전이 10만 냥 모였다며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지 말라고 했다.[3] 그러나 실제로는 빈부를 가리지 않고 집집마다 강제로 걷어 '원망하며 내는 돈(怨納錢)'이라 불렸다. 1865년 4월부터 1868년 8월까지 걷힌 원납금은 약 750만 냥이었고, 1만 냥 이상을 낸 사람에게는 수령 등 벼슬을 주었다.[1]
  • 결두전 - 토지 1결마다 100문씩 새로 거두었다.
  • 당백전 - 1866년 11월부터 상평통보 100배의 액면을 매긴 당백전을 찍었다. 실제 가치는 액면의 20분의 1에 지나지 않아 6개월 동안 1,600만 냥이 발행되면서 물가가 크게 올랐고, 결국 발행이 중단되었다. 1867년에는 값싼 청전을 들여와 유통했다.
  • 부역 동원 - 원납전을 낸 부유층은 부역을 피했지만 경기 농민들은 공사에 동원되어 이중의 고통을 겪었다. 기술자가 모자라자 승려 장인과 민간 장인까지 강제로 불러들였다.[1]

완공과 그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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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은 1867년 말 주요 공사를 마쳤고, 고종은 1868년(고종 5) 7월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겼다. 규모는 7,225칸 반에 이르렀다.[4] 국가유산청은 흥선 대원군이 1867년에 다시 세웠다고 적고, 『신편 한국사』는 완공을 1868년으로 본다.[5] 최익현은 1868년 상소에서 경복궁 중건 과정의 폐단을 비판했고, 1873년 다시 대원군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대원군이 물러나는 계기를 만들었다.[6]

흥선 대원군의 정책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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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시기 내용
경복궁 중건 1865~1868 원납전·당백전·결두전, 부역 동원
『대전회통』 편찬 1865 마지막 통일 법전
서원 철폐 1865 만동묘 ~ 1871 47개 사액 서원만 남김
호포제 1871 양반에게도 군포 부과
사창제 1867 환곡 대신 마을 단위 사창 운영
척화비 1871 신미양요 뒤 통상 거부 의지 표명
  1. ↑ 1.0 1.1 1.2 서원 철폐와 경복궁 중건, 『신편 한국사』 37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2. ↑ 『고종실록』 2권, 고종 2년 4월 2일, 대왕대비가 경복궁을 중건할 것을 명하다,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3. ↑ 『고종실록』 2권, 고종 2년 4월 5일, 대왕대비가 경복궁을 중건하는 데 백성을 동원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명하다,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4. ↑ 경복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5. ↑ 경복궁,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2026-10-19 확인.
  6. ↑ 최익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