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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도감(整治都監, 1347~1349)은 고려 충목왕 때 권세가의 불법 농장과 원 간섭기의 여러 폐단을 바로잡으려고 둔 개혁 기구로, 부원 세력을 처벌하다가 정동행성 이문소의 반발과 원의 제지로 좌절되었다.

충혜왕이 원에 끌려가 죽고 여덟 살의 충목왕이 즉위하자, 원은 고려에 폐정을 고치라고 요구했다. 이에 1347년(충목왕 3) 2월 정치도감을 세우고 왕후(王煦)·김영돈·안축·김광철을 판사로 삼았다. 『고려사』 세가는 정연 등 33명을 속관으로 임명했다고 적었고,[1] 『신편 한국사』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사 9명·부사 7명·판관 12명·녹사 6명을 합쳐 속관이 34명이었다고 적어 한 명이 어긋난다.[2][3] 실무를 맡은 정치관은 백문보·전녹생 등 대부분 과거에 합격한 관리였고, 안렴존무사를 겸해 각 도로 나갔다.

  • 개혁안 - 11개 항목의 '정리도감장'을 내세워 지방관의 탐학, 정동행성 같은 원 간섭 기구의 폐해, 토지 탈점·고리대·압량위천으로 생긴 농장, 어지러운 수취 체제를 바로잡으려 했다.
  • 양전 - 정치관을 각 도에 보내 백성의 땅을 측량하게 했다.
  • 부원 세력 처벌 - 기황후의 친척 기삼만과 기주를 잡아 가두었는데, 기삼만이 옥에서 죽었다. 노책·전영보 등도 인구를 숨기거나 양인을 억지로 노비로 삼은 죄로 처벌했다.[2]

기삼만이 죽자 원의 기구인 정동행성 이문소가 정치관 서호·전녹생을 가두며 반격했다. 원이 사신을 보내 개혁을 격려해 한때 풀려났으나, 1347년 7월부터 이문소가 다시 정치관을 잡아들였고 원은 백문보 등 정치관 16명을 곤장으로 다스려 정치도감의 활동이 부당하다고 판정했다. 원은 그 뒤 정치도감을 다시 두게 했지만 개혁은 되살아나지 못했고, 본격적인 활동은 석 달 남짓 만에 무너졌고, 충목왕이 죽고 충정왕이 즉위한 뒤 1349년(충정왕 1) 폐지되었다.[2][3] 개혁의 과제는 뒷날 공민왕의 반원 개혁과 신돈이 이끈 전민변정도감으로 이어졌다.

고려 후기의 개혁 기구와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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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 시기 한 일
정치도감 충목왕(1347) 폐정 개혁, 불법 농장 정리, 부원 세력 처벌
사림원 충선왕(1298) 왕명 출납·개혁 교서
전민변정도감 원종 때 처음, 공민왕 때 신돈 빼앗긴 토지와 노비를 되돌림
교정도감 무신 집권기 최충헌 최씨 정권의 최고 권력 기구
예의상정소 고려 중기 의례 제정 (→ 상정고금예문)
  1. ↑ 『고려사』 권37 세가 충목왕 3년 2월 기축, 정치도감을 설치해 33명의 속관을 두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
  2. ↑ 2.0 2.1 2.2 충목왕대의 정치도감, 『신편 한국사』 19,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
  3. ↑ 3.0 3.1 정치도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