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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는 5세기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의 충주까지 세력을 넓히고 신라를 아우로 대하던 관계를 새긴, 한반도 남쪽에 남은 유일한 고구려 비석이다.

충주 고구려비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 입석마을 어귀에 오래도록 서 있던 돌이다. 1979년 4월 단국대학교 학술 조사단이 비문을 살펴 고구려 비석임을 밝혔고, 옛 지명을 따라 중원 고구려비라고 불리다가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1981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지금은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안에 있다.[1]

  • 형태 - 화강암 돌기둥 네 면에 모두 글자를 새긴 4면비로, 광개토 대왕릉비를 작게 줄인 모습이다. 높이는 약 2m이다.
  • 글씨 - 예서풍의 글자로 한 행에 23자씩 새겼다. 앞면이 가장 잘 남아 있고 나머지 면은 닳아서 읽기 어렵다.
  • 연대 - 연호가 없어 비문의 '12월 23일 갑인' 같은 간지로 연대를 추정한다. 449년(장수왕 37) 전후설과 481년 무렵 등 장수왕 대 설, 문자명왕 대 설 등이 맞서고, 최근에는 첫머리를 '영락 7년'(397, 광개토 대왕 때)으로 읽는 견해도 나왔다.
  • 고려 대왕 - 고구려 왕을 '고려 태왕'으로 적어, 이 무렵 고구려가 스스로를 '고려'라고 불렀음을 보여 준다.
  • 신라를 동이로 - 신라 왕을 '동이 매금'이라 부르고 그와 신하들에게 의복을 내려 주었다. 고구려를 형, 신라를 아우로 놓은 관계로, 고구려가 자신을 중심에 둔 천하관을 가졌음을 보여 준다.
  • 신라토내당주 - 신라 땅 안에 고구려 군관(당주)이 머물렀다는 뜻으로, 고구려 군대가 신라 영토에 주둔했음을 알려 준다. 이는 400년 광개토 대왕이 신라를 도우려 군대를 보낸 뒤의 상황과 이어진다.
  • 고모루성 - 광개토 대왕릉비에도 나오는 성 이름이 나온다.[1]

충주와 고구려의 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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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년 고구려 장수왕이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뒤 남진 정책을 펴면서, 남한강 물길의 요지인 충주는 고구려의 국원성이 되어 남쪽 경영의 거점이 되었다.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에 가까운 이곳에 비석을 세워 신라와의 관계를 드러낸 것으로 본다.[2] 뒤에 신라 진흥왕이 이 지역을 차지해 국원소경을 두었다.

충주의 다른 역사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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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주성(충주산성) 전투 - 1253년 몽골의 5차 침입 때 방호별감 김윤후가 관노의 문서를 불태우며 70여 일 동안 성을 지켰다.
  • 다인철소 - 1255년 몽골군을 물리쳐 익안현으로 승격된 충주의 특수 행정 구역이다.
  • 탄금대 - 1592년 임진왜란 때 신립이 배수진을 치고 일본군과 싸우다 패한 곳이다.

다른 비석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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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세운 나라·때 내용
광개토 대왕릉비 고구려 장수왕(414) 광개토 대왕의 정복 활동, 신라 구원
충주 고구려비 고구려(5세기) 신라를 동이로 부르고 의복을 내림, 신라토내당주
단양 신라 적성비 신라 진흥왕 고구려 땅이던 적성을 차지하고 공을 세운 사람에게 상을 줌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신라 진흥왕 한강 하류를 차지한 뒤 돌아보며 세움
  1. ↑ 1.0 1.1 충주 고구려비,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2. ↑ 충주 고구려비와 중원 지역, 사료로 본 한국사,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