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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약(鄕約)은 조선 시대 향촌 사람들이 덕을 권하고 잘못을 서로 바로잡으며 어려울 때 돕기로 한 자치 규약으로, 16세기 사림이 중국 송의 「여씨향약」을 받아들여 보급했고 이황의 예안 향약, 이이의 해주 향약 등으로 조선의 실정에 맞게 바뀌었다.

향약은 북송 말 섬서성 남전현의 여씨 네 형제가 친척과 마을 사람들을 이끌려고 만든 규약에서 비롯했다. 그 네 강목은 다음과 같다.[1]

  • 덕업상권(德業相勸) - 좋은 일은 서로 권한다.
  • 과실상규(過失相規) - 잘못은 서로 바로잡는다.
  • 예속상교(禮俗相交) - 올바른 예속으로 서로 사귄다.
  • 환난상휼(患難相恤) -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

남송의 주희가 이를 고쳐 보탠 「주자증손여씨향약」을 『소학』에 실으면서 향약은 성리학적 향촌 질서를 세우는 실천 규범이 되었다.

  • 중종 때의 보급 운동 - 사림은 『소학』 실천 운동과 함께 향약을 퍼뜨렸다. 1517년(중종 12)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이 「여씨향약」의 언해본을 펴냈고, 조광조 등은 향약을 서울과 지방에서 시행하게 했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몰락하자 향약 시행도 꺾였다.[2]
  • 예안 향약 - 이황이 1556년(명종 11) 고향 예안에서 선배 이현보의 뜻을 이어 만들었다. 과실을 극벌·중벌·하벌로 나누어 벌하는 조목이 중심이며, 사족 중심의 자율적 성격이 강했다.
  • 이이의 향약 - 이이는 청주 목사로 있을 때 서원 향약을, 해주에서 해주 향약·해주 일향약속·사창계약속을 만들었다. 유향소를 활용해 관권과 맞물린 것도 있고, 20리 안의 마을 공동체를 단위로 한 것도 있었다.[1][2]
  • 조선 후기 - 17세기 이후 거의 모든 고을에 향규가, 마을마다 동약(동계)이 생겼다. 뒤에는 수령이 직접 향약을 이끌며 교화와 부세에 활용하는 군현 단위 향약이 늘었다.[2]

향약은 유교 예절과 풍속을 향촌에 퍼뜨리고 재난 때 서로 돕게 하는 장치였다. 동시에 사족이 향촌의 하층민을 다스리고 부세·환곡·군역에 관여하며 향촌 지배력을 굳히는 수단이기도 했다. 유향소·서원과 함께 사림의 향촌 기반이 되었다.[2]

향촌 기구와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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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 성격
유향소 지방 사족이 향리를 감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자치 기구
서원 선현을 제사하고 학문을 가르치던 사림의 사설 교육 기관(백운동 서원이 처음)
향교 국가가 군현마다 세운 관립 교육 기관
향약 향촌 사람들이 서로 돕고 교화하기로 한 자치 규약
두레 농민들이 함께 농사일을 하던 공동 노동 조직
  1. ↑ 1.0 1.1 향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
  2. ↑ 2.0 2.1 2.2 2.3 향약의 도입과 정착, 『신편 한국사』 31 조선 중기의 사회와 경제,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