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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李珥, 1536~1584)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문신으로, 『성학집요』·『동호문답』·『격몽요결』을 짓고 해주 향약을 시행했으며, 수미법·10만 양병설 등 개혁(경장)을 주장해 기호 학파의 뿌리가 되었다.

본관은 덕수, 호는 율곡이다.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신사임당이다. 어머니를 여읜 뒤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이듬해 돌아와 유학에 힘썼다. 1558년 예안으로 이황을 찾아가 학문을 논했다. 과거에 아홉 번 장원해 '구도장원공'이라 불렸다. 호조 좌랑으로 벼슬을 시작해 대사간·대제학·호조·이조·병조 판서를 지냈다. 동인과 서인이 갈라질 때 둘을 화해시키려 했으나, 죽은 뒤 그의 학통은 서인으로 이어졌다.[1]

  • 『동호문답』(1569) - 선조에게 올린 글로, 왕도 정치의 이상과 당시 현실의 개혁 방안을 문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 「만언봉사」(1574) - 정치·경제·사회 전반의 폐단을 지적하고 개혁을 건의한 긴 상소이다.
  • 『성학집요』(1575) - 성리학의 핵심을 간추려 왕이 갖추어야 할 학문(제왕학)을 정리해 선조에게 바쳤다. 이황의 『성학십도』와 짝을 이룬다.
  • 『격몽요결』(1577) - 처음 배우는 사람을 위한 입문서이다.
  • 경장론 - 나라가 중간에 쇠퇴하는 시기이므로 제도를 고쳐야 한다고 보았다.
  • 수미법 - 공물을 특산물 대신 쌀로 걷자고 주장했다. 이 생각은 뒷날 대동법으로 이어졌다.
  • 10만 양병설 - 1583년 병조 판서로서 「시무육조」를 올려 국방 강화를 주장했다. 10만 명을 길러야 한다는 주장으로 알려져 있다.
  • 사창제 - 지방에 곡식 창고를 두어 백성을 구제하자고 했다.
  • 서원 향약(1571) - 청주 목사로 있을 때 시행했다.
  • 해주 향약(1577) - 황해도 해주 석담에 머물 때 만들어 향촌 교화에 힘썼다. 사창 운영과 결합한 점이 특징이다.
  • 해주에 은병정사를 세워 제자를 길렀고, 김장생 등이 그의 학문을 이었다. 김장생의 제자 송시열이 다시 이를 이어 서인·노론 학통이 되었다.
  • 이기론 - 이(理)와 기(氣)는 떨어지지 않으며, 움직이는 것은 기이고 이는 그 위에 타는 것이라는 기발이승일도설을 내세웠다. 이를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다(이통기국)"는 말로 정리했다.
  • 이황의 이기호발설과 달리 기의 역할을 중시해, 현실 개혁을 강조하는 학풍의 바탕이 되었다.

비슷한 학자와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활동 인물
해주 향약, 『성학집요』, 『동호문답』, 수미법 이이
『성학십도』, 예안 향약, 소수 서원 사액 요청 이황
백운동 서원 건립 주세붕 (→ 서원)
『가례집람』으로 예학 정리 김장생 (이이의 제자)
기축봉사, 북벌론 송시열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 참여, 『해동제국기』 신숙주
  1. ↑ 이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