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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관(弘文館)은 조선 시대에 궁중의 경서와 사적을 관리하고 문서를 다루며 왕의 자문에 응하던 관청으로, 경연을 주관하고 사헌부·사간원과 함께 언론 삼사를 이루었다. 옥당(玉堂)이라고도 불렀다.

세조가 1456년 집현전을 없앤 뒤 그 기능 일부를 예문관이 맡았다. 1463년(세조 9) 양성지의 건의로 장서각을 홍문관이라 불렀으나 이때는 책을 보관하는 기관일 뿐이었다. 성종은 1470년 예문관에 옛 집현전처럼 전임 관원을 두었고, 1478년(성종 9) 집현전의 직제를 예문관에서 떼어 내 홍문관으로 옮기면서 학술·언론 기관인 홍문관이 성립했다. 연산군 때인 1504년 진독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 뒤 되살아났다.[1]

영사(정1품)·대제학(정2품)·제학(종2품)은 다른 벼슬을 가진 사람이 겸했고, 부제학(정3품 당상) 이하 직제학·전한·응교·부응교·교리·부교리·수찬·부수찬 등은 전임관이었다. 대제학은 학문의 권위를 상징하는 자리였고, 전임관의 우두머리는 부제학이었다. 관원은 모두 경연관을 겸했다. 관원이 되려면 홍문관·이조·의정부의 투표를 거쳐 후보 명부인 홍문록에 올라야 했다.[1]

  • 학술과 자문 - 궁중 서적과 문서를 관리하고 왕의 자문에 응했으며, 경연에서 왕에게 경서와 역사를 강의했다.
  • 언론 - 1488년(성종 19) 대간과 함께 다른 관청과 관원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대간의 주장을 거드는 데 그쳤으나, 점차 대간이 다루지 않은 문제를 직접 제기하고 대간의 침묵까지 비판했다.[2]
  • 청요직 - 출세가 보장되는 자리로, 조선의 정승·판서 가운데 홍문관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사림이 성장한 뒤에는 삼사 언론의 중심이 되었다.[1]

학문 기관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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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 때 특징
집현전 세종(1420)~세조(1456) 학문 연구, 경연, 훈민정음 창제 보좌
홍문관 성종(1478)~ 집현전 계승, 경연 주관, 언론 삼사, 옥당
규장각 정조(1776)~ 왕실 도서관이자 정책 연구 기관, 검서관
  1. ↑ 1.0 1.1 1.2 홍문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2. ↑ 홍문관의 설치와 그 기능, 사료로 본 한국사,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