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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 전투(黃山벌 戰鬪)는 660년(태종 무열왕 7, 의자왕 20) 7월 백제의 계백이 이끈 결사대 5,000명이 황산벌(지금의 충청남도 논산 연산 일대)에서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 5만 명을 막다가 패한 싸움으로, 이 패배로 백제는 곧 멸망했다.

계백 장군 그림(전쟁기념관)

642년 백제 의자왕이 대야성 등 신라 서쪽의 40여 성을 빼앗자(→ 대야성 전투), 신라는 김춘추를 당에 보내 648년 군사 동맹을 맺었다(→ 태종 무열왕). 660년 당의 소정방이 바닷길로, 신라군이 육로로 백제를 쳤다. 신라군은 5월 26일 서울을 떠나 6월 18일 남천정(지금의 이천)에 이르렀고, 7월 10일 사비 남쪽에서 당군과 만나기로 했다. 백제 조정은 백강과 탄현을 지키자는 흥수의 계책을 두고 의견이 갈려 대책을 세우지 못했고, 그사이 신라군은 탄현을 넘었다.[1]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7월 9일 김유신 등이 황산벌로 나아가자 계백이 먼저 험한 곳에 의지해 세 군데에 진을 치고 기다렸다. 신라군은 세 길로 나누어 네 번 싸웠으나 모두 불리해 병사들의 힘이 다했다.[2]

  • 반굴 - 장군 김흠순(흠춘)이 아들 반굴에게 충과 효를 함께 이루라고 하자, 반굴이 적진에 뛰어들어 싸우다 죽었다.
  • 관창 - 좌장군 품일이 열여섯 살 아들 관창을 내보냈다. 계백은 사로잡은 관창의 어림과 용기를 아껴 돌려보냈으나, 관창이 다시 뛰어들자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 결과 - 이를 본 신라군이 죽기를 각오하고 나아가 백제군을 크게 깨뜨렸다. 계백은 전사하고 좌평 충상·달솔 상영 등 20여 명이 사로잡혔다.[2]

계백은 싸움에 나서기 전 "처자가 적국의 노비가 되어 욕을 보느니 죽는 것이 낫다"며 가족을 먼저 죽였다고 전한다. 계백의 이름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堦伯', 열전에 '階伯'으로 적혀 있다.

황산벌 싸움으로 신라군은 약속한 날보다 늦게 당군과 만났고, 소정방이 이를 문제 삼아 신라 장수를 베려 하자 김유신이 맞서 막았다. 나당 연합군은 사비성을 에워쌌고, 의자왕은 웅진으로 피했다가 7월 18일 항복했다(→ 신라의 삼국 통일, 백제 부흥 운동).[1]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 속 싸움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싸움 연도 내용
관산성 전투 554 백제 성왕 전사, 나제 동맹 붕괴 (→ 관산성 전투)
대야성 전투 642 백제 윤충이 신라 대야성 함락 (→ 대야성 전투)
황산벌 전투 660 계백의 결사대와 김유신의 신라군
매소성·기벌포 싸움 675·676 나당 전쟁에서 신라가 당군을 물리침 (→ 나당 전쟁)
  1. ↑ 1.0 1.1 황산벌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
  2. ↑ 2.0 2.1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 7월 9일, 신라와 백제가 황산벌에서 싸우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