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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부흥 운동(百濟復興運動, 660~663)은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어 백제가 무너진 뒤 복신·도침·흑치상지 등이 왜에 있던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세우고 주류성·임존성을 근거로 나당 연합군에 맞서 나라를 되살리려 한 싸움이다.

부흥군의 거점이던 예산 임존성의 남쪽 성벽

660년 7월 나당 연합군에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항복했지만, 당군 1만과 신라군 7천만 남아 사비성을 지키고 당은 웅진도독부를 두어 옛 백제 땅을 군정으로 다스렸다. 지방에는 백제군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들이 곧바로 곳곳에서 일어나 한때 200여 성을 되찾을 만큼 기세를 올렸다.[1]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무왕의 조카 복신이 승려 도침과 함께 주류성에 근거해 군사를 일으키고, 일찍이 왜국에 인질로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세우자 서북부가 모두 호응했다고 적었다.[2]

  • 임존성의 흑치상지 - 달솔 흑치상지는 임존성(지금의 충남 예산 대흥)에서 열흘 만에 3만 명을 모아 소정방이 보낸 당군을 물리치고 200여 성을 되찾았다.
  • 주류성의 복신·도침 - 의자왕의 종형제인 복신과 승려 도침은 주류성을 거점으로 삼았다. 도침은 영군장군, 복신은 상잠장군을 일컬었다. 부흥군은 사비성의 당군(유인원)을 포위해 고립시켰다.
  • 부여풍 옹립 - 복신은 왜에 머물던 왕자 부여풍을 불러들여 왕으로 세웠다. 왜는 군대와 물자를 보내 부흥군을 도왔다.
  • 신라의 대응 - 태종 무열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사비성 구원에 나섰고, 661년 즉위한 문무왕은 옹산성 등 부흥군의 성을 쳐서 당군의 보급로를 뚫었다.
  • 내분 -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군사를 합쳤으나, 이번에는 부여풍과 복신이 서로 의심해 부여풍이 복신을 죽였다. 지도부가 서로 죽이면서 부흥군은 급속히 약해졌다.
  • 백강 전투(663) - 당은 손인사의 증원군 7천을 보냈다. 나당 연합군은 주류성으로 향했고, 백강 어귀에서 부흥군을 도우러 온 왜의 수군과 네 번 싸워 배 400척을 불태웠다. 부여풍은 고구려로 달아났고 주류성이 함락되었다.
  • 임존성 함락 - 흑치상지는 당에 항복했고, 끝까지 버티던 지수신의 임존성도 무너지면서 부흥 운동은 끝났다.
  • 이후 - 당은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665년 문무왕과 맹약을 맺게 하는 등 옛 백제 땅을 직접 다스리려 했다. 이것이 뒤의 나당 전쟁으로 이어졌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백강 싸움과 부여풍의 도주까지를 당나라 용삭 2년(662) 7월 기사에 몰아서 적었다.[3] 반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부흥 운동이 660년부터 663년 9월까지 이어졌다고 보고, 백강 전투를 663년의 일로 정리한다.[1]

삼국 통일 전후의 사건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건 시기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수의 군대를 크게 무찌름 612년 (살수 대첩)
윤충이 대야성을 함락함 642년 (대야성 전투)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죽임 642년 (연개소문)
김춘추가 당에 건너가 군사 동맹을 맺음 648년 (태종 무열왕)
복신·도침이 부여풍을 왕으로 세움 660~663년 백제 부흥 운동
안승을 고구려왕(뒤에 보덕왕)으로 봉함 670·674년 (문무왕)
시득이 기벌포에서 설인귀의 수군을 무찌름 676년 (나당 전쟁)
  1. ↑ 1.0 1.1 백제 부흥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복신이 부흥운동을 일으키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3. ↑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풍왕이 복신을 살해하고 부흥운동은 종말을 고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