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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는 임진왜란 뒤 조선이 1607년(선조 40), 1617년(광해군 9), 1624년(인조 2) 세 차례 일본 에도 막부에 보낸 외교 사절로, 일본 국서에 회답하고 끌려간 조선인 포로를 데려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1748년 에도에 들어가는 조선 통신사 행렬. 회답겸쇄환사의 뒤를 이은 사절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에도 막부는 쓰시마(대마도)를 통해 국교 회복을 거듭 요청했다. 조선은 1604년 사명당 유정을 탐적사로 보내 일본의 사정을 살피고 포로를 데려왔으며, 이어 일본 국왕 명의의 국서를 먼저 보낼 것과 선릉·정릉을 도굴한 범릉적을 압송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일본이 이에 응하자 1607년 여우길을 정사로 하는 사절단을 보냈다. 사절의 이름은 일본 국서에 '회답'하고 포로를 '쇄환'한다는 뜻이다.[1]

세 차례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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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정사 내용
1607(선조 40) 여우길 국교 재개, 포로 1,240명 쇄환
1617(광해군 9) 오윤겸 포로 쇄환, 에도까지 가지 않고 교토에서 국서를 전함
1624(인조 2) 정립 포로 쇄환

1607년 사절단의 규모는 『사료로 본 한국사』가 467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통신사 일람표가 504명으로 적어 서로 다르다.[1][2]

통신사라 부르지 않은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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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는 신의를 통하는 대등한 나라 사이의 사절이라는 뜻이다. 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던 조선은 도쿠가와 막부를 아직 신의를 나눌 상대로 보지 않았고, 북방 여진의 위협에 대비해 남쪽을 안정시키고 포로를 데려오려는 실리 때문에 사절을 보낸다는 뜻에서 이 이름을 썼다. 1636년(인조 14) 임광 일행부터 '통신사'라는 이름을 다시 썼다.[2]

조선과 막부 사이의 교섭은 쓰시마가 대행했다. 쓰시마는 두 나라의 외교 마찰을 피하려고 세 차례 사행 때 오간 국서 11통 대부분을 고쳐 썼다. 1607년 조선 국서는 답서 형식이었으나 먼저 보내는 국서처럼 바뀌었고, 조선 국왕의 도장까지 위조되었다. 이 위조는 뒷날 국서 개작 사건으로 드러나 문제가 되었다.[3]

일본과의 사절·약조와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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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때
신숙주가 통신사 서장관으로 다녀와 『해동제국기』를 지음 1443년 사행, 1471년 편찬 (→ 해동제국기)
사명당 유정이 탐적사로 가서 포로를 데려옴 1604(선조 37)
회답겸쇄환사 파견 1607·1617·1624
기유약조로 세견선 20척, 부산포 왜관에서만 교역 1609(광해군 1) (→ 왜관)
'통신사' 명칭 회복 1636(인조 14)
  1. ↑ 1.0 1.1 통신사 파견, 사료로 본 한국사,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
  2. ↑ 2.0 2.1 통신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
  3. ↑ 제2·3회 회답겸쇄환사의 파견과 대마도의 국서 위조, 『신편 한국사』 32 조선 후기의 정치,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