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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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通信使)는 조선 국왕이 일본의 막부 쇼군(일본 국왕)에게 국서를 보내려고 파견한 공식 외교 사절단으로, 조선 후기에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 일본에 건너갔다.

'통신'은 대등한 나라끼리 신의를 나눈다는 뜻이다. 조선은 명(뒤에는 청)과의 사대와 달리 일본과는 대등한 교린 관계를 맺었고, 그 상징이 통신사였다(→ 사대교린). 쇼군이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사절은 일본 국왕사라 했다.[1]
통신사라는 이름을 쓴 첫 사절은 고려 말 1375년 왜구 금지를 요청하러 간 사절이었으나, 제 조건을 갖춘 통신사는 세종 때 박서생 일행부터로 본다. 백과사전 본문은 그 해를 1428년(세종 10)으로, 같은 항목의 통신사 일람표는 1429년으로 적어 서로 다르다. 조선 시대 전체로는 전기 8회, 후기 12회를 합해 20회로 센다.[1]
- 국교 회복 - 임진왜란 뒤 에도 막부가 국교 재개를 청하자 1607년·1617년·1624년에 사절을 보냈다. 이때는 도쿠가와 막부를 믿을 만한 상대로 인정하지 않아 '회답 겸 쇄환사'라 부르며 국서에 답하고 끌려간 포로를 데려오는 데 힘썼다.
- 이름의 회복 - 1636년부터 다시 통신사라 불렀다. 명·청 교체로 동아시아 질서가 흔들리면서 조선과 일본이 대등한 외교를 굳히려 한 결과이다.
- 목적 - 겉으로는 새 쇼군의 취임 축하가 대부분이었지만, 그때마다 일본 사정 탐색, 무역 조정, 외교 의례 문제 같은 현안이 함께 있었다. 18세기에는 의례적 성격이 짙어졌다.
- 끝 - 1811년(순조 11) 김이교 일행은 에도까지 가지 않고 대마도에서 국서를 바꾸는 '역지통신'으로 사행을 마쳤고, 이것이 마지막 통신사가 되었다.[1]
- 구성 - 정사·부사·종사관(삼사) 아래 제술관·역관·의원·화원·악대·마상재 등이 따라 많을 때는 400~500명에 이르렀다. 1682년(숙종 8)에 정비된 규정으로는 577명이었다.
- 여정 - 한양을 떠나 부산 영가대에서 해신제를 지내고 배 6척으로 대마도에 건너간 뒤, 세토 내해를 거쳐 오사카에 상륙하고 교토를 지나 에도까지 갔다. 왕복에 대개 5~8개월이 걸렸다.
- 문화 교류 - 머무는 곳마다 일본 유학자·문인과 필담을 나누고 시문을 주고받았으며, 조선 사신의 글씨와 그림이 일본에서 병풍·두루마리·판화로 만들어져 널리 퍼졌다. 사신들은 신유한 『해유록』, 조엄 『해사일기』 같은 사행 기록을 남겼다.[1]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 사행과 관련된 외교 기록·여정 기록·문화 교류 기록이 한국과 일본에 나뉘어 전하는데, 두 나라가 함께 신청해 2017년 조선통신사 기록물로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올랐다. 국가유산청은 이 기록물이 임진왜란 뒤 끊어진 국교를 회복하고 대등하게 서로를 존중하는 '성신교린'의 교류를 보여 준다고 설명한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