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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군 6진(四郡六鎭)은 조선 세종 때 여진을 몰아내고 압록강 상류에 설치한 4군과 두만강 하류 남쪽에 설치한 6진을 함께 이르는 말로, 이로써 조선의 북쪽 경계가 압록강과 두만강에 이르게 되었다.

고려 말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수복과 이성계 집안의 동북면 경략으로 조선 초 영역은 이미 두만강 하류 가까이 이르렀다. 1406년(태종 6)에는 경성·경원에 무역소를 두어 여진이 와서 소금·무쇠 등을 바꾸어 가게 했다. 그러나 여진의 침입이 잦아 태종 때 경원부를 뒤로 물리기도 했고, 세종 초에는 경원부를 더 남쪽으로 옮기자는 논의까지 일었다. 세종은 "조종의 옛 땅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없다"며 북방 개척을 밀고 나갔다.[1][2]

  • 개척 - 1432년(세종 14) 파저강 유역의 여진(추장 이만주)이 여연에 쳐들어오자, 1433년 평안도 절제사 최윤덕이 이들을 토벌했다. 1437년에는 이천이 8,000명을 이끌고 다시 출정했다.
  • 설치 - 여연(1416년 설치)에 이어 자성(1432)·무창(1440년 현, 1442년 군)·우예(1443)가 차례로 들어서 압록강 상류의 4군이 갖추어졌다.
  • 폐4군 - 땅이 험해 지키기 어렵고 여진의 압박이 계속되자 단종·세조 때 주민을 강계·구성 등지로 옮기고 군을 폐지했다. 이 지역을 '폐4군'이라 부른다. 학계에서는 영토 포기라기보다 방어선을 뒤로 물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
  • 계기 - 1433년 두만강 유역 우디거족이 오도리족을 쳐서 추장 동맹가티무르 부자를 죽였다. 세종은 이 내분을 틈타 김종서를 함길도 도절제사로 보내 개척을 맡겼고, 이징옥이 무력으로 뒷받침했다.
  • 설치 - 1434년(세종 16)부터 회령·종성·경원·경흥을 설치하고, 1440~1441년 온성을 두었으며, 1449년(세종 31) 부령을 두어 6진이 완성되었다. 1442년에는 두만강을 따라 장성을 쌓았다.
  • 사민 정책 - 남쪽 지방의 백성을 이주시켜 새 땅을 개척하게 하고, 그 지역 출신을 토관으로 삼아 다스리게 했다. 처음에는 자원자를 모았으나 부족해 하삼도에 호수를 배정해 옮겼고, 이주민의 저항과 도망이 잇따랐다.
  • 6진은 그 뒤에도 국경 방어선 구실을 했고, 청이 들어선 뒤에는 국경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 6진 완성 시기를 백과사전은 1449년 부령부 설치로, 우리역사넷 연대기는 경흥이 도호부가 된 1443년까지로 잡아 표제를 '1434~1443'으로 적는다.

세종 때 대외 정책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실 대상과 인물
압록강 상류에 4군 설치 여진, 최윤덕
두만강 하류에 6진 개척 여진, 김종서
1419년 왜구의 근거지 쓰시마 정벌 일본, 이종무 (→ 대마도 정벌)
1443년 세견선 50척·세사미두 200석으로 무역 제한 쓰시마 도주 (→ 계해약조)
  1. ↑ 육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4군 6진 개척 1434~1443,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