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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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정벌(對馬島征伐)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섬(대마도)을 친 세 차례의 원정으로, 흔히 가리키는 것은 1419년(세종 1) 상왕 태종의 주도 아래 이종무가 이끈 원정(기해동정)이다.

14세기 일본은 남북조의 혼란으로 지방 통제가 약했고, 땅이 척박해 교역에 기대 살던 쓰시마·이키·마쓰우라 일대가 왜구의 본거지가 되었다. 고려와 조선은 성을 쌓고 수군을 늘리는 한편 본거지를 직접 치는 원정을 세 번 벌였다.[1]
- 1389년(고려 창왕 1) - 박위가 전함 100척으로 쳐서 왜선 300척과 해안의 건물을 불태우고 붙잡혀 간 고려인 100여 명을 데려왔다.
- 1396년(조선 태조 5) - 김사형을 5도 병마도통처치사로 삼아 이키와 쓰시마를 치게 했다. 규모와 결과는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 1419년(세종 1) - 아래의 기해동정.
- 발단 - 1419년 5월, 명으로 향하던 왜선 수십 척이 충청도 비인현 도두음곶을 노략질해 병선 7척을 잃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왕위를 세종에게 넘기고도 군사권을 쥐고 있던 상왕 태종이 정벌을 결정했다. 쓰시마의 새 도주 소 사다모리(종정성)가 섬 안의 세력을 통제하지 못하던 때였다.
- 출정 - 삼군 도체찰사 이종무가 병선 227척, 군사 1만 7,285명을 거느리고 6월 19일 거제 남쪽 주원방포를 떠났다. 정벌군은 섬 가운데의 아소만(淺茅灣)에 들어가 도주에게 항복을 권했으나 답이 없자 상륙해 배 129척을 빼앗고 가옥 1,939호를 불태웠으며, 114명을 베고 21명을 사로잡았고 붙잡혀 있던 중국인 131명을 찾아냈다.
- 철군 - 6월 29일 박실이 이끈 좌군이 복병을 만나 큰 피해를 입었다. 도주가 철군을 청하고 태종도 오래 머물지 말라고 명해 7월 3일 거제로 돌아왔다.
- 전후 처리 - 1420년 1월 쓰시마를 경상도에 속하게 하고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서계를 올리게 하며, 사신은 반드시 도주의 서계를 지니게 하는 선에서 교섭이 마무리되었다.[2]
- 조선군 전사자를 백과사전은 '백수십 명'으로, 우리역사넷은 180명으로 적는다. 우리역사넷 해설은 이 원정이 명의 일본 원정 논의를 미리 막으려는 뜻도 있었다고 본다.
정벌 뒤 큰 규모의 왜구는 더 일어나지 않았다. 조선은 쓰시마 도주에게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는 통교자를 통제하는 권한을 주고, 경제적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주는 대신 평화로운 통교자로 바꾸어 나갔다. 1426년 삼포를 열고, 1443년 계해약조로 무역 규모를 정한 것이 그 흐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