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
IT 위키
더 많은 작업
여진(女眞)은 만주와 두만강·압록강 일대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으로, 고려·조선과 교역하고 맞서기를 거듭하다가 12세기에 금, 17세기에 후금(뒤의 청)을 세웠다.

여진이라는 이름은 10세기 초 발해가 멸망한 뒤 처음 나타났다. 만주에 흩어져 살던 발해 유민과 흑룡강·송화강 일대에서 남하한 말갈 계통 종족을 함께 이르는 말이었다. 고려는 압록강 쪽 여진을 서여진(숙여진), 두만강 쪽 여진을 동여진(생여진)이라 불렀고, 명은 건주여진·해서여진·야인여진으로 나누었다. 조선은 알타리(오도리)·올량합·올적합·토착여진으로 구분했다. 1616년 누르하치가 여러 부족을 통합해 후금을 세웠고, 후금은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치면서 여진을 만주족이라 부르게 했다.[1]
- 회유와 교역 - 고려는 귀화한 여진인에게 집과 땅을 주고, 추장에게 무산계와 향직을 주었다. 여진은 활·말·모피를 바치고 옷감·곡식·농기구를 받아 갔다.
- 동여진 해적 - 11세기 초 동여진이 배를 타고 동해안과 울릉도, 일본 쓰시마·규슈까지 약탈했다. 고려는 1009년 진명도부서를 두어 수군으로 막았고, 1019년에는 해적에게 끌려가던 일본인 259명을 구해 돌려보냈다.
- 별무반과 동북 9성 - 완안부가 세력을 넓혀 정평 장성 부근에서 고려군과 충돌하자, 윤관의 건의로 신기군·신보군·항마군으로 이루어진 별무반을 만들었다(1104). 1107년 윤관이 17만 군사로 여진을 쳐 동북 9성을 쌓았으나 1년여 만에 돌려주었다(→ 윤관).
- 금과의 사대 - 1115년 아구타가 금을 세우고 고려에 형제 관계를, 요를 멸망시킨 뒤에는 군신 관계를 요구했다. 집권자 이자겸이 이를 받아들여 1126년 사대 관계가 맺어졌다.[1]
조선은 여진에게 벼슬을 주고(수직) 서울에 와서 토산물을 바치게 하는(내조) 회유책과, 침입하면 군사로 치는 강경책을 함께 썼다.
- 무역소(1406) - 함경도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두어 여진이 말·모피를 소금·쇠·옷감과 바꾸어 가게 했다. 북방의 신하가 여진의 출입을 아주 막으면 소금과 쇠를 얻지 못한 여진이 변경을 어지럽힐 것이라고 건의한 데 따른 것이다.[2]
- 4군 6진 - 세종 때 최윤덕이 압록강 상류 파저강 유역의 여진을 쳐서 4군을, 김종서가 두만강 하류에 6진을 설치했다. 성 밖에 사는 여진인(성저야인)은 조선의 울타리(번리)로 삼았다.
- 침입과 정벌 - 백과사전은 조선 초부터 정묘호란 전까지 여진이 131차례 쳐들어왔고 조선이 15차례 정벌했다고 정리한다. 첫 정벌은 1410년 경원 침입 때였다.[1]
- 번호의 반란 - 16세기 두만강 유역 여진(번호)은 모피 교역으로 성장했다. 변경 장수들의 수탈이 겹쳐 1583년 니탕개의 난이 일어났다.
- 시전 부락 정벌(1588) -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이 변경을 자주 침범하던 두만강 건너 시전 부락을 쳤다. 이 장면을 그린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는 이일의 손자 이견이 만든 원본을 1849년(헌종 15)에 다시 그린 것으로, 조선에 드문 전쟁 기록화이다.[3]
- ↑ 1.0 1.1 1.2 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 ↑ 『태종실록』 11권, 태종 6년(1406) 5월 10일 기해 2번째 기사,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설치하도록 명하다,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 ↑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