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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해약조(癸亥約條)는 1443년(세종 25) 조선이 쓰시마 도주와 맺은 무역 약조로, 쓰시마에서 해마다 보낼 수 있는 배(세견선)를 50척, 조선이 해마다 내려 주는 쌀과 콩(세사미두)을 200석으로 제한했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1471)에 실린 쓰시마 지도

대마도 정벌(1419) 뒤 조선은 왜인의 통교를 허락하되 엄격히 통제하는 길을 택했다. 1426년 부산포·내이포(제포)·염포의 삼포를 열어 왜관을 두고 그곳에서만 머물며 교역하게 했고, 쓰시마 도주가 발급한 도항 증명서(문인)를 지닌 배만 받아들였다. 이렇게 조금씩 틀을 갖추어 가다가 1443년 구체적인 약조를 맺었다.[1][2]

  • 세견선 - 쓰시마 도주가 해마다 보내는 배는 50척으로 한다.
  • 세사미두 - 조선은 도주에게 해마다 쌀과 콩을 합해 200석을 준다.
  • 특송선 - 특별히 보고할 일이 있으면 정해진 수 밖에 특송선을 보낼 수 있다.
  • 백과사전은 여기에 삼포 체류 기한(20일)과 상경한 자의 배를 지키는 사람의 체류 기한(50일), 고초도에서 고기잡이하는 자의 어세 규정을 더해 다섯 조항으로 소개한다. 반면 『증정교린지』에 전하는 조문은 세견선·세사미두(와 특송선) 규정뿐이어서, 우리역사넷은 오늘날 전하는 것은 이 두 항목뿐이라고 본다.
  • 약조를 맺은 조선 측 인물도 엇갈린다. 백과사전은 일본에 통신사로 갔다 돌아오던 변효문이 도주 소 사다모리(종정성)와 맺었다고 하고, 우리역사넷은 쓰시마 체찰사 이예가 맺었다고 적는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처음 문서로 정한 약조로, 이후 다른 통교자들과 세견선을 정하는 기준이 되었고 임진왜란 전까지 대일 관계의 기본 틀이었다. 1510년 삼포왜란 뒤 1512년(중종 7) 임신약조로 세견선은 25척, 세사미두는 100석으로 반으로 줄고 제포 하나만 열렸다. 1547년 정미약조도 이 틀을 조정한 것이다. 임진왜란 뒤 1609년 기유약조로 교역이 다시 열렸다.

비슷한 이름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약조 때 내용
계해약조 1443년, 세종 세견선 50척, 세사미두 200석
임신약조 1512년, 중종 삼포왜란 뒤 세견선 25척, 세사미두 100석
기유약조 1609년, 광해군 임진왜란 뒤 국교 재개, 세견선 20척
정묘약조 1627년, 인조 후금과 형제 관계 (→ 정묘약조)
  1. ↑ 계해약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계해약조, 우리역사넷 사료로 본 한국사(『증정교린지』 권4 약조),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