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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大加耶)는 지금의 경상북도 고령을 중심으로 5세기 중엽부터 후기 가야 연맹을 이끈 가야의 나라로, 562년(진흥왕 23) 신라의 이사부에게 정복되었다.

고령 주산 능선에 늘어선 지산동 고분군

가라국·고령가야라고도 하며, 처음 이름은 반파국으로 본다. 『삼국사기』 지리지는 고령군이 본래 대가야국으로 시조 이진아시왕부터 도설지왕까지 16대 520년 동안 이어졌고, 진흥왕이 이를 쳐서 없애고 대가야군을 두었다고 적었다. 가야산 일대의 철과 낙동강 물길을 바탕으로 성장해, 400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금관가야가 약해진 뒤 가야 연맹의 중심이 되었다.[1]

  • 남제와의 교섭 - 479년 가라국왕 하지가 중국 남제에 사신을 보내 '보국장군 본국왕'의 작호를 받았다. 가야의 나라 가운데 중국 왕조와 직접 통한 드문 예이다.
  • 세력 확장 - 전성기에는 소백산맥을 넘어 남원·임실 등 섬진강 유역과 남해안 일부까지 영향력을 넓혔다.
  • 신라와의 혼인 - 522년 대가야 왕이 신라에 혼인을 청해 신라 왕족 여성이 시집왔다. 그러나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 왜와의 교류 - 5세기 후반 일본 열도의 유력자 무덤에서 대가야 계통의 말갖춤과 장신구가 많이 나오고, 고령 양식 토기가 규슈와 세토 내해 연안에 퍼졌다. 왜와의 교역 중심이 김해에서 고령으로 옮겨 왔음을 보여 준다.[1]
  • 가야금 - 가실왕 때 악사 우륵이 가야금 12곡을 지었다. 우륵은 나라가 흔들리자 신라로 가서 진흥왕의 보호를 받으며 가야금을 전했다.

554년 백제 성왕과 함께 신라를 쳤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크게 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562년 9월 가야가 배반하자 진흥왕이 이사부에게 치게 하고 화랑 사다함을 부장으로 딸려 보냈다. 사다함이 기병 5천을 이끌고 먼저 전단문으로 뛰어들어 흰 깃발을 세우자 성안 사람들이 두려워했고, 이사부의 군대가 이르자 모두 항복했다.[2] 『일본서기』는 이때 신라가 가라국·안라국 등 가야 10국을 멸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한 해를 562년으로 적으면서 532년설을 함께 실었다. 562년은 대가야가, 532년은 금관가야가 무너진 해이므로, 두 나라의 기록이 섞인 것으로 본다.[1]

  • 고령 지산동 고분군 - 대가야 왕성 뒤 주산 능선에 크고 작은 무덤 수백 기가 늘어서 있다. 44호분은 주인공 무덤 둘레에 30여 기의 순장 돌덧널을 둔 대규모 순장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2023년 김해 대성동·함안 말이산 고분군 등과 함께 '가야 고분군'으로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올랐다.
  • 고령 주산성 - 왕성 뒤 산 위에 쌓은 방어성이다.
  • 국가유산청은 고령군을 경주·부여·공주·익산에 이어 다섯 번째 고도(古都)로 지정했다.

금관가야와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구분 금관가야 대가야
중심지 김해 고령
연맹 전기 가야 연맹의 맹주 후기 가야 연맹의 맹주
멸망 532년 법흥왕에게 항복 562년 진흥왕 때 이사부에게 정복
대표 유적 김해 대성동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 광평성 같은 정치 기구를 둔 나라는 후고구려(태봉)이다(→ 궁예).
  • 화백 회의와 박·석·김 3성의 왕위 교대는 신라의 일이다(→ 삼국의 귀족 회의, 신라).
  • 대가들이 사자·조의·선인을 거느린 나라는 고구려이다.
  1. ↑ 1.0 1.1 1.2 대가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23년(562) 9월, 가야를 토벌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