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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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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三千萬同胞에게 泣告함)은 1948년 2월 10일 김구가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남북 지도자 회의를 통한 통일 정부 수립을 호소하며 발표한 성명이다.

1947년 11월 국제 연합(UN) 총회는 인구 비례에 따른 남북 총선거를 결의하고 UN 한국 임시 위원단을 보냈으나, 1948년 1월 위원단은 38도선 이북 입국을 거부당했다. 남한만의 선거와 정부 수립이 가시화되던 2월 10일 김구가 이 성명을 발표했고, 2월 11~12일 『서울신문』·『경향신문』·『조선일보』, 2월 13일 『독립신문』 등에 실렸다. 성명이 나온 뒤인 2월 26일 UN 소총회는 선거가 가능한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치르기로 결의했다.[1][2]

  • 통일 정부의 원칙 - 남북의 정치범 동시 석방, 미소 양군의 철수, 남북 지도자 회의 소집을 내세웠다.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다"며 UN 위원단이 남북 통일 정부 수립의 임무를 끝까지 다하라고 요구했다.
  • 단독 정부 반대 - 남한만의 정부는 분단을 굳힐 뿐이라며, 그것을 중앙 정부라 부르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 38선 -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고 하고, 통일된 조국을 세우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동족상잔 경고 - 세계가 두 진영으로 갈려 전쟁 위기가 커지는 가운데 동족끼리 싸우면 외세만 이롭게 된다고 경고하고, 내부 투쟁을 멈추고 단결하자고 호소했다.[1]

김구와 김규식은 북측에 남북 요인 회담을 제의했고,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 협상이 열렸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5.10 총선거가 치러져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9월 9일 북한에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들어섰다. 김구는 7월 통일 독립 촉진회를 만들어 통일 운동을 이어 가다 1949년 6월 암살되었다.[2]

광복 직후 통일 정부 수립 노력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실 때
여운형이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조직 1945.8
송진우·김성수 등이 한국 민주당 창당 1945.9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개최 1945.12
좌우 합작 위원회의 좌우 합작 7원칙 발표 (→ 좌우 합작 운동) 1946.10
김구의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발표 1948.2.10
김구·김규식의 남북 협상 1948.4
최초의 보통 선거인 5.10 총선거 1948.5.10
  1. ↑ 1.0 1.1 김구, '삼천만동포에게 읍고함' 성명서 발표, 『자료대한민국사』 6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2. ↑ 2.0 2.1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반대-김구의 성명 발표, 우리역사넷(사료로 본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