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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辛旽, ?~1371)은 고려 공민왕 때 왕의 신임을 받아 1365년부터 6년 동안 국정을 맡은 승려로, 전민변정도감을 두어 권세가가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되돌리고 성균관을 다시 세우는 등 개혁을 이끌었으나 반대 세력에 밀려 처형되었다.

법명은 편조(遍照)이고 영산(지금의 경남 창녕) 신씨이다. 어머니는 옥천사의 노비였다고 전한다. 1358년 무렵 김원명의 소개로 공민왕을 만났다. 공민왕은 대대로 벼슬한 큰 가문, 새로 진출한 세력, 유생 모두가 무리를 지어 왕권을 제약한다고 보고, 욕심이 적고 집안 배경이 없어 당파를 만들지 못할 승려를 개혁의 적임자로 골랐다. 1365년(공민왕 14) 노국 대장 공주가 죽은 뒤 왕의 사부가 되어 정치에 나섰다.[1]

  • 권력 장악 - 1365년 최영 등 무장 세력을 지방으로 내쫓고, 그해 12월 영도첨의사사사·판감찰사사·취성부원군 등 최고 직위를 한꺼번에 받았다.[2]
  • 전민변정도감(1366) - 스스로 판사가 되어 권세가가 빼앗은 토지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양인이었다고 호소하는 노비를 풀어 주었다. 노비들이 '성인이 나왔다'고 할 만큼 백성의 지지를 얻었다. → 전민변정도감
  • 국학 중흥(1367) - 숭문관 옛터에 성균관을 다시 짓고 오경사서재를 두었으며, 이색을 대사성으로, 정몽주·이숭인 등을 학관으로 삼았다. 이들 신진 사대부가 성장하는 바탕이 되었다. → 성균관, 이색
  • 관료 기강 - 산관을 서울에 올라와 숙위하게 하고, 근무 연한에 따라 승진시키는 순자격제(1368)를 시행했다.

1366년 정추·이존오가 신돈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 뒤로 반대가 이어졌고, 1367년과 1368년에는 그를 죽이려는 모의가 드러났다. 권력이 커지자 공민왕도 경계했고, 1369년 신돈이 5도 도사심관을 겸하려 하자 거절했다. 1371년(공민왕 20) 역모 혐의로 수원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7월 처형되었고 일당도 처형·유배되었다.[3]

『고려사』는 신돈을 반역 열전에 싣고 요승·사승으로 부르며 그의 사생활을 나쁘게 그렸다. 반면 백과사전은 전민변정 사업, 국학 중흥, 관리 기강 확립을 개혁가로서의 면모로 높이 평가한다.[1] 신돈을 몰아낸 쪽이 쓴 기록이라는 점을 감안해 읽어야 한다. 조선 건국 세력은 우왕·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고 주장해(신우·신창) 이들을 폐위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고려 말 개혁 인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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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시기 활동
신돈 공민왕 전민변정도감 판사, 성균관 중건
최영 공민왕~우왕 홍건적·왜구 격퇴, 요동 정벌 추진
이색 공민왕~우왕 성균관 대사성, 성리학 교육
최우 고종 정방 설치, 강화 천도
임연 원종 원종 폐위, 안경공 옹립
  1. ↑ 1.0 1.1 신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고려사』 권41 세가41 공민왕 14년 12월, 신돈에게 공신호를 내리고 관직을 임명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3. ↑ 『고려사』 권43 세가43 공민왕 20년 7월, 신돈과 그 일당들을 처형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