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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저(沃沮)는 지금의 함경도 동해안 일대에 있던 초기 국가로, 왕 없이 읍군·삼로 같은 군장이 각 읍락을 다스렸으며 민며느리제와 가족 공동 무덤의 풍속으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 개마대산(개마고원)의 동쪽, 큰 바닷가에 자리 잡았다. 함흥 일대의 동옥저와 두만강 유역의 북옥저(치구루)로 나뉘며 풍속은 같았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동옥저의 호수를 5천 호로 적었다.[1]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무너진 뒤 한의 현도군·낙랑군에 딸렸다가, 1세기 무렵부터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태조왕 4년(56)에 동옥저를 쳐서 땅을 넓혔다고 적었다.[2]

  • 읍군·삼로 - 여러 읍락이 하나로 뭉치지 못해 큰 군장이 없었고, 읍락마다 우두머리가 자치적으로 다스렸다. 동예도 같았다.
  • 고구려에 공납 - 고구려는 읍락의 우두머리를 사자로 삼아 간접 지배하고, 고구려의 대가를 보내 공납을 거두었다. 옥저는 베·물고기·소금 같은 해산물을 바쳤고, 미녀를 보내기도 했다.
  • 소와 말이 적어 걸어서 싸우는 데 능했다.
  • 민며느리제 - 여자아이가 열 살 무렵 되면 양가가 혼인을 약속하고, 신랑 집에서 데려다 키웠다. 다 자라면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친정에서 요구한 돈을 신랑 집이 치른 뒤에야 다시 데려와 혼인했다. 『삼국지』가 『위략』을 인용해 전한 풍속이다.[3] 고구려의 서옥제와 반대 방향처럼 보이지만, 혼인으로 줄어드는 노동력을 재물로 보상한다는 점은 같다.
  • 가족 공동 무덤 - 사람이 죽으면 흙이나 풀로 덮어 임시로 묻었다가, 살이 썩은 뒤 뼈만 추려 길이 10여 장(丈)에 이르는 큰 나무 덧널에 넣었다. 한 집안 사람은 모두 같은 덧널을 썼고, 죽은 사람의 모습을 나무로 깎아 곁에 두었다. 덧널 입구에는 쌀을 담은 그릇을 매달았다.[2]

동예와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실 나라
민며느리제, 뼈를 추려 한 덧널에 묻는 가족 공동 무덤 옥저
책화, 족외혼, 10월 무천, 단궁·과하마·반어피 동예
서옥제, 10월 동맹, 부경 고구려
여러 가(加)가 사출도를 다스림, 12월 영고 부여
천군이 다스리는 소도, 5월·10월 계절제 삼한
  1. ↑ 東沃沮는 고구려 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는데,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동옥저, 중국정사 조선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026-10-19 확인.
  2. ↑ 2.0 2.1 옥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3. ↑ 옥저의 민며느리 풍속,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사료로 본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