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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거에서 넘어옴)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은 충청남도 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고향에서 농촌 계몽 운동을 펼치다 중국으로 건너가 한인 애국단에 들어갔고,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군 수뇌부에 폭탄을 던진 뒤 순국했다.

1932년 한인 애국단 입단 선서 때의 윤봉길

호는 매헌(梅軒)이고 본관은 파평이다. 1918년 덕산 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이듬해 3.1 운동에 자극받아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후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고, 1921년부터 오치서숙에서 경전을 공부했다.[1]

농촌 계몽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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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학과 『농민독본』 - 1926년 무렵부터 농민 계몽에 나서 야학을 열고, 1927년 교재 『농민독본』을 지었다.
  • 부흥원과 월진회 - 1929년 부흥원을 세워 농촌 부흥 운동을 본격화했고, 농민들을 모아 자활 단체인 월진회를 조직해 회장이 되었다. 수암 체육회도 꾸려 청년들의 몸과 정신을 길렀다.
  • 망명 - 1930년 "장부가 집을 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글을 남기고 만주로 떠났다. 선천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 뒤 만주와 칭다오를 거쳐 1931년 상하이로 갔다.[1]

훙커우 공원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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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에서 공장 직공으로 일하던 윤봉길은 1931년 겨울 김구를 찾아가 목숨을 바칠 뜻을 밝혔다. 1932년 1월 이봉창의 도쿄 의거가 실패하고 일제가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 승리하자, 일제는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 생일(천장절) 겸 전승 기념식을 열기로 했다. 윤봉길은 4월 26일 한인 애국단에 입단 선서를 하고, 4월 29일 식장 단상에 폭탄을 던졌다.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이 숨지고, 노무라 해군 중장·우에다 육군 중장·시게미쓰 주중 공사 등이 크게 다쳤다. 폭탄은 중국군에 있던 김홍일(왕웅)이 만든 것이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붙잡혀 일본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해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에서 총살되었다.[1]

이 의거는 침체에 빠져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되살린 사건으로 평가된다.[2]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게 되었고, 뤄양 군관 학교에 한인 특별반이 생겼다. 정부는 1962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태어나고 자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일대는 1972년 10월 14일 사적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으로 지정되었다.[3]

의열 투쟁을 한 인물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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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거 인물 소속
상하이 훙커우 공원 투탄(1932) 윤봉길 한인 애국단
도쿄에서 일왕 행렬에 투탄(1932) 이봉창 한인 애국단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사살(1909) 안중근 대한 의군
동양 척식 주식회사·식산은행 투탄(1926) 나석주 의열단
부산 경찰서 투탄(1920) 박재혁 의열단
  1. ↑ 1.0 1.1 1.2 윤봉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신편 한국사 48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3. ↑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