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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공신회맹축(二十功臣會盟軸)은 1680년(숙종 6) 개국 공신부터 보사 공신까지 20종의 공신과 그 자손이 모여 충성을 맹세한 회맹제를 기념해, 1694년(숙종 20) 녹훈도감에서 만든 두루마리 왕실 문서로, 정식 이름은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이며 국보이다.

'회맹'은 공신과 그 자손이 임금과 함께 하늘에 제사 지내며 충성을 다짐하는 의식이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밀려나고 서인이 집권하면서 남인의 역모를 고발한 공으로 김만기·김석주 등이 보사 공신에 책봉되었고, 그해 8월 30일 역대 공신의 자손들과 함께 회맹제를 올렸다. 이 문서에는 그 회맹 때의 글과 명단, 뒤의 복훈 사실이 함께 담겼다.[1][2]

환국과 보사 공신

편집 원본 편집

보사 공신의 지위는 숙종 때의 환국에 따라 세 번 뒤바뀌었다.

  • 1680년 경신환국 - 서인 집권, 보사 공신 책봉.
  • 1689년 기사환국 - 남인 집권, 보사 공신의 훈작을 깎음(파훈).
  • 1694년 갑술환국 - 서인 재집권, 훈작을 되돌림(복훈). 김만기·김석주 등 1~3등 6명의 공신 칭호가 회복되었다.

문서 끝에는 "기사년에 파훈되고 갑술년에 복훈되었다"는 주기를 달고 국새인 '시명지보'를 찍었다. 공신의 지위가 붕당의 부침에 따라 박탈되었다가 회복되는 과정이 그대로 드러나, 숙종 때 급변하는 정국을 보여 주는 자료로 꼽힌다.

  • 구성 - 회맹문, 참여자 명단인 회맹록(489명), 1694년 복훈을 종묘에 고한 축문과 제문으로 이루어졌다. 1680년 회맹에는 대상 489명 가운데 412명이 참석했다.
  • 규모 - 길이가 약 24m에 이르러 왕실 문서 가운데 유례를 찾기 어렵다. 국보 지정 예고 때는 약 25m로 소개되었다.
  • 가치 - 1910년까지 전래가 확인된 회맹축은 1646년·1694년·1728년의 세 건뿐이고, 임금이 보도록 만든 어람용으로 형식과 내용을 온전히 갖춘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 200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국보로 승격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소장한다.

숙종 때의 일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실 왕
환국을 거듭하며 왕권 강화, 금위영 설치로 5군영 완성, 상평통보 유통 숙종
초계문신제, 장용영, 수원 화성 정조
탕평비 건립, 균역법 영조
내시노비 6만 6천여 명 해방 순조 (→ 공노비 해방)
『농사직설』 편찬 세종 (→ 농사직설)
  1. ↑ 압도적인 규모와 형식을 겸비한 조선왕실 문서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 국보 지정, 월간 국가유산사랑, 국가유산청, 2026-10-19 확인.
  2. ↑ 20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