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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義天, 1055~1101)은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로 출가한 승려로, 송에서 돌아와 교장(敎藏)을 간행하고 국청사를 중심으로 해동 천태종을 열어 교종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려 했다.

이름은 후(煦), 자는 의천이며 시호는 대각국사(大覺國師)이다. 11세에 출가해 영통사의 경덕국사 난원에게 화엄학을 배웠고, 문종에게서 우세(祐世)라는 승통 칭호를 받았다. 1085년(선종 2) 왕과 대신들이 말렸는데도 몰래 송에 건너가 화엄·천태 등 여러 종파의 승려와 교리를 논했고, 이듬해 불교 서적 3,000여 권을 가지고 돌아왔다.[1]

귀국 뒤 흥왕사 주지가 되어 교장 간행을 이끌었고, 1097년(숙종 2) 완공된 국청사의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강의했다. 1099년 천태종 승려를 뽑는 승선이 처음 열리면서 천태종이 하나의 종파로 자리 잡았다. 1101년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 교장도감 -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두고 경·율·논 삼장에 대한 고려·송·요·일본 승려들의 주석서(장소)를 모아 간행했다.
  • 『신편제종교장총록』 - 간행에 앞서 모은 주석서의 목록을 정리한 책이다. 장소 1,010종 4,800여 권을 실었으며, 경·율·논 본문이 아닌 주석서만 모아 목록을 만든 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이었다.[2]
  • 교장은 흔히 '속장경'이라고도 불렸으나, 대장경(경·율·논 본문)이 아니라 그 주석서를 모은 것이다. 판목은 몽골 침입 때 불타 없어졌고 인쇄본 일부만 전한다.
  • 이 밖에 『원종문류』·『석원사림』 등을 엮었고, 문집으로 『대각국사문집』이 있다.

해동 천태종과 교관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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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동 천태종 - 당시 고려 불교는 교종(화엄종 등)과 선종이 대립하고 있었다. 의천은 국청사를 근거로 천태종을 열고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아우르려 했다.
  • 교관겸수(敎觀兼修) - 경전 공부(교)와 참선 수행(관)을 함께 닦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론만 붙들거나 수행만 앞세우는 쪽을 모두 비판했다.[3]
  • 내외겸전(內外兼全) - 불교 공부(내학)와 유학 등 바깥 학문(외학)을 함께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 의천이 세상을 떠난 뒤 천태종은 힘을 잃었고, 무신 집권기에는 지눌의 수선사와 요세의 백련사가 새 흐름을 이끌었다.

의천은 형 숙종에게 화폐를 만들어 써야 한다고 건의했다. 숙종은 1097년 주전도감을 설치했고, 이후 해동통보 등 동전과 은병(활구)이 만들어졌다(→ 고려의 경제).

고려의 승려와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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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인물
교장 간행, 해동 천태종 개창, 교관겸수, 국청사 의천
보현십원가(향가)로 화엄 교리를 대중에게 전함, 귀법사(광종 때) 균여
수선사 결사, 정혜쌍수·돈오점수, 선종 중심의 교종 통합 지눌
유불 일치설, 『선문염송집』 편찬 혜심
법화 신앙을 바탕으로 강진 만덕사에서 백련 결사 요세
불교 설화와 단군 이야기를 담은 역사서 편찬 일연 (→ 삼국유사)
  1. ↑ 의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2. ↑ 신편제종교장총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3. ↑ 교관겸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