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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경주 출신의 몰락 양반으로, 1860년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한울님을 모신다는 시천주를 내세운 동학을 창시하고 1864년 대구에서 처형된 종교 사상가이다.

최제우

호는 수운(水雲), 본래 이름은 제선(濟宣)이고 어릴 때 이름은 복술(福述)이다. 경주 가정리에서 몰락한 양반 최옥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편 한국사』는 그를 서자로 적는다. 젊어서 장사와 의술·점술 등을 하며 떠돌다가, 세상의 어지러움이 천명을 돌보지 않는 데서 온다고 보고 1856년부터 양산 천성산 등에서 수도했다. 1859년 10월 가족과 함께 경주로 돌아와 구미산 용담정에서 수련하며 이름을 '어리석은 사람을 구제한다'는 뜻의 제우로 고쳤다.[1][2]

동학 창시와 포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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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 체험(1860) - 1860년 음력 4월 한울님의 말씀을 듣는 체험을 했다고 밝혔다. 날짜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4월 5일로, 『신편 한국사』는 4월 15일로 적는다. 최제우가 지은 『용담유사』에는 "4월이라 초5일"이라는 구절이 있다.[1][2]
  • 포교(1861) - 1861년부터 가르침을 펴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유생들이 서학(천주교)을 믿는다고 비난하자 1861년 11월 호남으로 피해 남원 은적암에 머물며 「논학문」·「안심가」·「교훈가」 등을 지었다.
  • 접주제(1862) - 1862년 9월 경주 관아에 붙잡혔다가 교도 수백 명이 석방을 청해 풀려났다. 그해 12월 경주·영덕·대구 등 각지에 접소를 두고 접주가 교도를 거느리게 하는 접주제를 만들었다.
  • 후계자 - 1863년 7월 최시형을 북접주인으로 삼고 8월 도통을 물려주어 2대 교주로 정했다.[1]

1863년 11월(음력) 조정이 보낸 선전관 정운구에게 제자 20여 명과 함께 경주에서 붙잡혔다. 서울로 끌려가던 중 철종이 세상을 떠나자 대구 감영으로 옮겨져 심문을 받았다. 『고종실록』 1864년 3월 2일 기사에 따르면 의정부는 동학이 서양의 사술을 그대로 따르면서 이름만 바꾸어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한다며 그 두목 최복술(최제우)을 군사와 백성을 모아 놓고 효수하자고 아뢰었고, 대왕대비가 허락했다.[3] 최제우는 1864년 3월 10일 대구 장대에서 좌도난정(그릇된 도로 바른 도리를 어지럽힘)의 죄로 처형되었다. 41세였다.[1]

  • 시천주 - 사람마다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가르침으로, 신분과 남녀의 차별을 넘어서는 평등 사상의 바탕이 되었다.
  • 보국안민 - 서양 세력과 어지러운 세상에 맞서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 경전 - 남긴 글은 최시형이 한문 경전 『동경대전』과 한글 가사집 『용담유사』로 엮어 펴냈다.

동학의 세 교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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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활동
최제우(1대) 동학 창시(1860), 시천주, 접주제, 1864년 처형
최시형(2대) 『동경대전』·『용담유사』 간행, 사인여천, 교조 신원 운동, 1898년 처형
손병희(3대) 1905년 천도교로 개칭, 인내천, 3.1 운동 민족 대표
전봉준 고부 접주,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을 이끔
  1. ↑ 1.0 1.1 1.2 1.3 최제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
  2. ↑ 2.0 2.1 2) 동학의 창도 과정, 『신편 한국사』 37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
  3. ↑ 『고종실록』 1권, 고종 1년 3월 2일 임인 1번째 기사 「동학 두목 최복술을 참형에 처하다」,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