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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全琫準, 1855~1895)은 1894년 고부 봉기를 이끌고 동학 농민군의 대장으로서 전주성 점령, 집강소 설치, 반외세 2차 봉기를 지휘하다가 붙잡혀 처형된 동학 접주이자 농민 운동 지도자이다.

1893년 고부에서 작성된 사발통문

몸집이 작아 '녹두'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녹두 장군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 전라도 태인 등지에서 세 마지기 남짓한 논밭을 부치며 마을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소농이었다. 1890년 무렵 동학에 들어가 2대 교주 최시형에게서 고부 지방의 접주로 임명되었다. 뒤에 남긴 진술에서 그는 동학을 받아들인 까닭을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히 하려는 보국안민에 두었다고 밝혔다.[1]

아래 달은 음력이다.

  • 사발통문 - 고부 군수 조병갑은 만석보를 새로 쌓게 하고 물세를 거두는 등 수탈을 일삼았다. 1893년 12월 전봉준은 농민들의 진정서를 대표해 올렸다가 쫓겨나자, 동지 20명과 함께 주모자를 알 수 없도록 이름을 사발 모양으로 둥글게 적은 사발통문을 만들어 거사를 맹약했다.
  • 고부 봉기(1894년 1월) - 1,000여 명을 이끌고 고부 관아를 점령해 무기고를 열고, 빼앗긴 세곡을 농민에게 돌려주었다. 정부가 보낸 안핵사 이용태가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려 탄압하자 다시 일어섰다.
  • 백산 봉기(3월) - 백산에 1만여 명이 모였다. 전봉준은 동도대장으로 추대되고 손화중·김개남이 총관령으로 보좌했다. 4대 강령과 격문을 띄워 각지 농민의 호응을 불렀다.
  • 전주성 점령(4월) - 황토현에서 전라 감영군을, 장성 황룡촌에서 홍계훈의 경군을 깨뜨리고 4월 27일 전주성에 들어갔다. 청군과 일본군이 들어오자 폐정 개혁안을 내걸고 정부와 전주 화약을 맺었다.[1]

집강소와 2차 봉기

편집 원본 편집
  • 집강소 - 화약 뒤 전라 감사 김학진과 손잡고 전라도 각 고을에 집강소를 두어 폐정 개혁을 실천했다. 전봉준은 전주의 대도소를 근거로 전라우도를, 김개남은 남원을 근거로 전라좌도를 맡았다.
  • 2차 봉기(9월) -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 전쟁을 일으키자 일본을 몰아내려 다시 일어섰다. 남접 농민군에 손병희가 이끈 북접이 합세해 논산에 모였다.
  • 우금치 패전(11월) -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신식 화력에 크게 패했다. 순창으로 피신했다가 옛 부하의 밀고로 12월 2일 붙잡혀 서울로 끌려갔다.

1895년 2월부터 3월까지 다섯 차례 신문을 받았고, 셋째 신문의 일부와 넷째부터는 일본 영사가 직접 캐물었다. 일본 쪽은 흥선 대원군과의 연결을 집요하게 물었으나 전봉준은 이를 부인하고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 이 신문 기록이 『전봉준 공초』로, 274개 물음에 걸쳐 봉기의 목적과 경과, 농민군의 규모를 지도자 본인의 입으로 전하는 유일한 진술 자료이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해제는 원본이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있다고 적는다.[2] 전봉준은 1895년 3월 손화중·최경선 등과 함께 교수형을 받았다. 『전봉준 공초』는 202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오른 동학농민혁명기록물에 들어 있다.[3]

비슷한 농민 항쟁 지도자와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인물 사건 사실
전봉준 동학 농민 운동(1894) 사발통문, 고부 봉기, 집강소, 우금치 전투
홍경래 홍경래의 난(1811) 서북 지역 차별에 반발, 정주성 항전
유계춘 임술 농민 봉기(1862) 진주 농민 봉기, 박규수가 안핵사로 파견됨
손병희 동학 북접, 뒤의 천도교 2차 봉기 때 북접을 이끌고 논산에서 합세
  1. ↑ 1.0 1.1 전봉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전봉준공초 해제, 동학농민혁명 종합지식정보시스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26-10-19 확인.
  3. ↑ 동학농민혁명기록물,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