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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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관(春秋館)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그때그때의 나랏일(시정)을 기록하고 역사를 편찬하는 일을 맡은 관청으로, 조선에서는 실록 편찬과 보관을 담당했다.
고려 초에는 사관(史館)이라 불렀다. 1308년(충렬왕 34) 문한서와 합쳐 예문춘추관이 되었다가 1325년 다시 나뉘었고, 이후 사관·춘추관으로 이름이 여러 번 바뀌었다. 1389년(공양왕 1) 예문관과 춘추관이 다시 합쳐져 조선 건국 초까지 예문춘추관으로 이어졌다. 1401년(태종 1) 둘이 분리되면서 예문관 관원은 녹봉을 받는 전임관(녹관)으로, 춘추관 관직은 다른 관청 관원이 겸하는 겸관으로 정해졌다.[1]
- 겸관 체제 - 『경국대전』에 따르면 영사는 영의정, 감사(監事)는 좌·우의정이 겸했고, 지사·동지사·수찬관·편수관·기주관·기사관을 모두 문관으로 두되 승정원·홍문관·의정부·예문관·사헌부·사간원·육조 등의 관원이 겸했다.
- 사관 - 춘추관직을 겸한 관원을 넓은 뜻의 사관이라 했다. 그 가운데 예문관의 봉교·대교·검열 8명이 전임 사관으로서 날마다 왕 곁에서 일을 기록했다. 문과에 급제한 젊은 인재가 뽑혔고 '한림'이라고도 불렸다.
- 사초 작성 - 사관은 왕과 신하가 나눈 말과 나랏일을 있는 그대로 적어 사초(史草)를 만들었다. 사초는 왕도 볼 수 없게 했다.
- 시정기 편찬 - 사초와 각 관청의 문서를 모아 해마다 시정기를 엮었다.
- 실록 편찬 - 왕이 죽으면 임시로 실록청(찬수청)을 두어 사초·시정기·『승정원일기』 등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했다. 편찬 뒤 사초는 물에 씻어 없앴다(세초).
- 실록 보관 - 완성된 실록을 서울의 춘추관 사고와 지방의 사고에 나누어 보관했다. 임진왜란 때 전주 사고본만 남은 뒤로는 묘향산(뒤에 적상산)·태백산·오대산·마니산(뒤에 정족산) 등 깊은 산에 사고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