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메뉴 여닫기
환경 설정 메뉴 여닫기
개인 메뉴 여닫기
로그인하지 않음
지금 편집한다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될 수 있습니다.

연행사(燕行使)는 조선 후기 청의 수도 북경(연경)에 보낸 조선 사신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명에 보낸 사신을 '조천사'라 부른 것과 구별된다.

명 때에는 천자의 조정에 간다는 뜻으로 조천사(朝天使)라 했다. 병자호란 뒤 청에 사대하게 되었지만 조선은 청을 오랑캐로 여겨 높이는 뜻을 빼고, 북경의 옛 이름 연경에 가는 사절이라는 뜻으로 연행사라 불렀다.[1] 사신이 남긴 기록도 명 때 것은 『조천록』, 청 때 것은 『연행록』이라 한다.

  • 정기 사행 - 명 때의 제도를 따라 새해(정조)·황제 생일(성절)·동지에 사신을 보냈는데, 1645년(인조 23)부터는 이를 합쳐 해마다 한 번 보냈다(삼절연공행, 흔히 동지사).[1]
  • 임시 사행 - 사은사·주청사·진하사·진위사·진향사·고부사 등을 일이 있을 때마다 보냈고, 동지사에 그 임무를 겹쳐 맡기기도 했다.
  • 구성 - 정사·부사·서장관(삼사)을 비롯한 정관 30명 안팎에 수행원을 합쳐 200~300명이 움직였다. 서장관은 날마다 일을 기록하고 돌아와 보고 들은 것을 왕에게 보고했으며, 정관 대부분은 사역원의 역관이었다.[2]
  • 여정 -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심양·산해관을 거쳐 북경에 이르렀다. 거리를 백과사전은 3,100리, 우리역사넷은 약 3,069리로 적는다. 북경 체류는 백과사전이 대개 60일까지, 우리역사넷은 보통 30~40일로 적어 차이가 있다.[2][1]
  • 무역 - 사신은 표문·자문 같은 외교 문서와 조공품을 가져가 조공과 회사(답례)의 형식으로 무역을 했고, 이를 따라간 역관과 상인의 사무역도 활발했다.[2]
  • 횟수와 끝 - 1637년부터 1894년까지 청에 간 연행사는 507회이다. 마지막 연행사는 1894년 서태후의 육순을 축하하러 간 진하사였고, 청일 전쟁 뒤 조공·책봉 관계가 무너지면서 사라졌다.[2][1]

북경에 머무는 동안 사신과 수행원은 청의 학자와 사귀고 서점가 유리창, 천주당을 둘러보았다. 홍대용은 1765년(영조 41) 서장관 홍억을 수행해 북경에 62일 머무는 동안 33일을 청 학자들과 사귀었고[2] 『을병연행록』을 남겼으며,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연행록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저술로 꼽힌다. 이런 경험이 청의 문물을 배우자는 북학파의 바탕이 되었다.[1]

조선의 외교 사절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절 보낸 곳 남긴 기록
조천사 명 『조천록』
연행사 청 『연행록』, 『열하일기』
통신사 일본 에도 막부 『해유록』, 『해사일기』
조사 시찰단 일본(1881) 시찰 보고서, 문견사건
영선사 청(1881) 김윤식, 톈진에서 무기 제조 학습
  1. ↑ 1.0 1.1 1.2 1.3 1.4 연행사,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7 확인.
  2. ↑ 2.0 2.1 2.2 2.3 2.4 연행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7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