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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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는 육영 공원 교사로 와서 한글 세계 지리서 『사민필지』를 쓰고, 을사늑약 뒤 고종의 밀사로 미국과 헤이그에서 일본의 침략을 알린 미국인 선교사·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미국 버몬트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다트머스 대학을 나오고 유니언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 뒤 조선 정부가 근대 학교를 세우려고 미국에 교사를 청하자, 벙커·길모어와 함께 뽑혀 1886년 7월 4일 제물포에 도착했다. 한국 이름(한자 표기)은 흘법(訖法)이다.[1]
- 육영 공원 - 1886년 9월 문을 연 육영 공원에서 영어·수학·지리·역사 등을 영어로 가르쳤다. 학생들이 세계 지리에 큰 관심을 보이자 순 한글 세계 지리서 『사민필지』를 펴냈다. 1891년 12월 계약이 끝나 귀국했다.
- 선교사로 다시 옴 - 1893년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와서 배재 학당의 삼문 출판사를 맡고, 영문 잡지 『코리안 리포지터리』를 다시 펴냈다. 1897년 관립 한성 사범 학교 교장을 지냈다.
- 한국 알리기 - 1901년 영문 월간지 『코리아 리뷰』를 창간했고, 『한국사』(1905), 『대한 제국 멸망사』(1906)를 써서 한국의 역사와 일본의 침략을 세계에 알렸다. 한글의 우수성을 소개하는 글도 여러 편 썼다.[2]
- 을미사변 뒤 - 1895년 명성 황후 시해 사건을 『코리안 리포지터리』에 자세히 보도하고, 언더우드·에비슨 등과 번갈아 고종의 곁을 지켰다.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옮기려던 춘생문 사건에도 관여했다.
- 고종의 밀사 - 1905년 가을 고종의 친서를 가지고 미국에 가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하려 했으나 면담을 거절당했다. 을사늑약이 맺어진 뒤 12월 고종이 보낸 "조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전보를 미국 국무부에 전하고 신문에 공개했다.
- 헤이그 특사 -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이상설·이준·이위종과 별도로 활동하며 일본의 불법을 알렸다. 이후 미국에 머물며 강연과 기고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 그 뒤 - 1919년에는 미국 상원 외교 위원회에 일제의 식민 통치를 고발하는 글을 내는 등 3.1 운동을 지지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 뒤 1949년 86세의 나이로 다시 왔다가 8월 5일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고, 유언대로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1950년 외국인으로는 처음 건국 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 ↑ 호머 베잘렐 헐버트, 이달의 독립운동가,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2026-10-19 확인.
- ↑ 호머 베잘렐 헐버트,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