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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4~1910)는 영국인 베델과 양기탁이 서울에서 창간한 일간 신문으로, 일본의 검열을 피해 항일 논조를 펴고 국채 보상 운동을 이끌었다.

1904년 러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서울에 머물며 민간 신문을 미리 검열했다. 영국은 일본과 동맹 관계였으므로, 영국인 명의로 낸 신문은 치외 법권을 내세워 이 검열을 피할 수 있었다. 이에 1904년 7월 베델(한국 이름 배설)이 발행인 겸 편집인, 양기탁이 실무 책임자가 되어 신문을 창간했다.[1]

  • 세 가지 판 - 1905년부터 국한문판과 영문판(『코리아 데일리 뉴스』)을 따로 냈고, 1907년 5월 순 한글판을 새로 내어 세 신문을 함께 발행했다. 발행 부수가 1만 부를 넘어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었다.
  • 항일 논조 - 일본이 '폭도'라 부르게 한 의병을 사실 그대로 보도하고, 을사늑약 뒤 일본의 침략을 거세게 비판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이 신문 한 줄이 자신의 백 마디 말보다 한국인을 움직인다고 불평했다.
  • 국채 보상 운동 - 1907년 대구의 국채 보상 취지서를 싣고 신문사에 성금을 받는 곳을 두어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 신민회 - 양기탁 등 신문 관계자가 신민회에 참여해 신문이 사실상 그 기관지 구실을 했다.

일본은 신문지법을 고쳐 외국인이 내는 신문도 압수할 수 있게 하고, 영국 영사 재판에 베델을 고발해 1908년 유죄 판결을 받게 했다. 같은 해 양기탁을 국채 보상금 횡령 혐의로 구속했으나 무죄로 풀려났다. 베델이 물러난 뒤 1910년 6월 판권이 넘어갔고, 국권 피탈 뒤에는 '대한' 두 글자를 뗀 『매일신보』가 되어 조선 총독부 기관지로 바뀌었다.

개항기·대한 제국의 신문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신문 창간 특징
『한성순보』 1883 박문국에서 발행, 순 한문, 열흘마다 내는 관보
독립신문 1896 서재필, 순 한글판과 영문판
『황성신문』 1898 국한문 혼용,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제국신문 1898 순 한글, 서민층과 부녀자 독자
대한매일신보 1904 베델·양기탁, 국한문·영문·한글판, 국채 보상 운동 주도
『만세보』 1906 천도교 기관지
『동아일보』 1920 문화 통치기 창간, 1931~1934년 농촌 계몽 운동인 브나로드 운동 주도
  1. ↑ 대한매일신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