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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화사(玄化寺)는 고려 현종이 부모인 안종과 헌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개경 근처 영취산에 세운 절로, 절의 창건을 기록한 현화사비에 송과 거란의 연호가 함께 새겨져 고려 전기의 다원적 대외 관계를 보여 준다.

현종은 즉위 전 승려가 되어 목숨을 위협받았고, 아버지 안종 왕욱은 경종의 왕비였던 헌정왕후와의 일로 귀양을 갔다가 죽었다. 즉위한 현종은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큰 절을 짓게 했다. 우리역사넷은 1018년(현종 9) 창건을 시작했다고 하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021년(현종 12)에 절이 완공되었다고 적는다. 공사 감독은 최사위가 맡았고, 주지로는 삼천사 주지 법경을 불러 왕사로 삼았다. 이름 앞에 붙은 '대자은'은 이 절이 법상종(유가종) 소속임을 뜻하며, 현화사는 고려 중기 법상종의 중심 사찰이 되었다.[1]

1021년 절이 완공되자 창건 내력을 적은 비를 세웠다. 비 머리에는 현종이 직접 전서로 '영취산대자은현화사지비명'이라 썼다.

  • 앞면 - 송에서 귀화한 문인 주저가 글을 짓고 채충순이 해서로 썼다. 비문 끝에 송의 연호 천희(天禧) 5년(1021) 7월에 세웠다고 적었다.
  • 뒷면(음기) - 채충순이 짓고 행서로 썼다. 끝에 거란(요)의 연호 태평(太平) 2년(1022)이라 적었다. 음기에는 현종이 해마다 4월 8일부터 사흘간 미륵보살회를, 7월 15일부터 사흘간 미타불회를 열고, 『대반야경』 등의 경판을 새겨 절에 두었다는 내용이 실렸다.[2]
  • 높이 238cm, 폭 130cm 남짓으로, 지금은 북한 개성 지역의 현화사 터에 있다.[3]

두 연호가 함께 새겨진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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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침입(993) 뒤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썼으나, 2차 침입 이후 관계가 다시 나빠지자 1016년(현종 7)부터 송의 연호를 썼다. 1019년 귀주 대첩으로 거란의 3차 침입을 물리친 고려는 거란과 강화를 추진했고, 1022년(현종 13) 4월 거란의 책봉을 받으면서 송의 연호를 버리고 다시 거란의 연호 태평을 쓰게 되었다(『고려사』 현종 13년 4월).[4] 1021년 7월에 세운 앞면과 1022년에 새긴 뒷면의 연호가 다른 것은 이 짧은 사이의 외교 변화를 그대로 보여 준다. 고려는 전쟁에서 이기고도 거란과의 조공·책봉 관계를 받아들이는 한편 송과의 문화 교류도 이어 가며, 어느 한 나라에 치우치지 않는 실리 외교를 폈다(→ 고려 거란 전쟁).

그 밖의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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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화사 칠층석탑 - 1020년 무렵 현종이 부처의 사리와 안종 능 근처 절에서 나온 어금니를 모시려고 세운 탑이다.
  • 현종 이후 덕종·문종이 현종의 제사를 이 절에서 열었고, 의종은 자주 행차했다. 15세기 후반에는 크게 쇠락했고, 17세기 초 이후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1]

거란과의 관계를 보여 주는 일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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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관련 일
비의 앞면에 송 연호, 뒷면에 거란 연호 현화사비(1021~1022)
부처의 힘으로 거란을 물리치려고 대장경을 새김 초조대장경(1011~)
여진 정벌을 위해 신기군·신보군·항마군을 편성 별무반(숙종, 1104)
왜구를 막으려 화약 무기를 만드는 관청을 둠 화통도감(우왕, 1377)
원이 서경에 둔 통치 기구의 반환을 요구 동녕부(1270~1290)
  1. ↑ 1.0 1.1 현화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현화사비, 한국금석문 자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3. ↑ 현화사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4. ↑ 국교 수립과 단절, 『한국문화사』,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