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 (고려)
IT 위키
더 많은 작업
현종(顯宗, 992~1031, 재위 1009~1031)은 고려의 제8대 왕으로, 강조의 정변으로 즉위해 거란의 2차·3차 침입을 이겨 내고 5도 양계의 지방 제도와 초조대장경 조판을 시작해 고려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이름은 왕순(王詢), 즉위 전 칭호는 대량원군이다. 태조의 아들 안종 왕욱과 경종의 왕비였던 헌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목종 때 천추태후와 그 측근 김치양이 자기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 하자 승려가 되어 숭교사·신혈사에 머물며 목숨을 위협받았다. 1009년 서북면의 강조가 군사를 이끌고 개경에 들어와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고 목종을 폐위·살해한 뒤 대량원군을 왕으로 세웠다(강조의 정변).[1]
거란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 삼아 1010년 2차 침입을 했다. 자세한 경과는 고려 거란 전쟁 문서에 있다.
- 강조의 패배와 나주 피난 - 강조가 통주에서 패해 붙잡혀 죽고 개경이 함락되었다. 현종은 남쪽으로 피난해 나주까지 내려갔다. 양규가 퇴각하는 거란군을 곳곳에서 괴롭혔고, 거란은 현종이 직접 거란에 와서 예를 갖추겠다는 약속(친조)을 받고 물러났다.
- 3차 침입과 귀주 대첩 - 현종이 친조를 지키지 않고 강동 6주 반환도 거절하자 1018년 소배압이 10만 대군으로 쳐들어왔다. 상원수 강감찬이 이듬해(1019) 퇴각하는 거란군을 귀주에서 크게 무찔렀다.
- 전후 방비 - 강감찬의 건의로 개경 둘레에 나성을 쌓기 시작해 1029년 완성했다. 현종이 죽은 뒤 덕종·정종 때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 도련포까지 천리장성을 쌓았다.
- 5도 양계 - 1012년 성종 때 둔 12주 절도사를 폐지하고 5도호·75도 안무사를 두었으며, 1018년 무렵 경·목·도호부·군·현·진으로 이어지는 지방 제도의 골격을 완성했다. 일반 행정 구역인 5도와 군사 구역인 동계·북계(양계)로 나누었다.
- 향리 제도 정비 - 각 군현 호장 등 향리의 정원과 공복을 정해 지방 세력을 국가 체제 안에 묶었다.
- 불교 행사 부활 - 성종 때 축소된 연등회·팔관회를 다시 열었다. 부모의 명복을 빌려고 개경 근처에 현화사를 세웠다. 1021년 세운 현화사비는 앞면에 송의 연호 천희를, 이듬해 새긴 뒷면에 거란의 연호 태평을 적어 거란과 강화한 무렵의 외교 변화를 보여 준다.
- 초조대장경 - 1011년 거란군이 개경에서 물러나지 않자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려는 뜻에서 대장경판을 새기기 시작했다. → 초조대장경
- 7대 실록 - 거란 침입으로 불탄 역대 기록을 되살리려 태조부터 목종까지의 실록 편찬을 시작했다(덕종 때 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