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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거란 전쟁(993~1019)은 거란(요)이 세 차례에 걸쳐 고려에 쳐들어온 전쟁으로, 고려는 서희의 외교 담판과 강감찬의 귀주 대첩으로 이를 막아 내고 이후 약 100년 동안 거란과 평화 관계를 유지했다.

10세기 초 만주에서 일어난 거란은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송과 대립했다. 고려 태조는 거란이 보낸 낙타 50필을 만부교 아래에 매어 굶겨 죽이고 사신을 섬으로 귀양 보내는 등 거란을 적대했고(만부교 사건, 942), 송과 친선 관계를 맺었다. 송을 치기 전에 배후의 고려를 누르려던 거란은 세 차례 고려를 침입했다.[1]

  • 침입 - 성종 때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칭하며 쳐들어와 고구려 옛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조정에서는 서경 이북 땅을 떼어 주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 서희의 외교 담판 - 서희가 소손녕의 진영에 가서 "고려는 고구려를 이은 나라이며, 국호도 그래서 고려"라고 반박했다. 거란과 교류하지 못하는 것은 압록강 유역을 여진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라며, 여진을 몰아내고 길을 열면 교류하겠다고 했다.[2]
  • 결과 - 고려는 송과 관계를 끊고 거란과 교류하기로 하는 대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흥화·용주·통주·철주·귀주·곽주)를 얻었다.

2차 침입(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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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실 - 1009년 강조가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세운 강조의 정변을 문제 삼아 거란 성종이 4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왔다.
  • 경과 - 강조가 통주에서 패해 죽고 개경이 함락되었다. 현종은 나주까지 피난했다. 흥화진의 양규는 끝까지 성을 지키고 돌아가는 거란군을 쳐서 포로가 된 백성을 되찾았다.
  • 강화 - 거란은 현종이 친히 거란 조정에 가겠다는 약속(친조)을 받고 물러났다. 이 무렵 현종은 초조대장경 조판을 시작했다.

3차 침입(1018~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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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침입 - 현종이 친조를 하지 않고 강동 6주 반환도 거부하자 1018년 소배압이 10만 대군으로 쳐들어왔다.
  • 귀주 대첩 - 상원수 강감찬이 흥화진에서 쇠가죽으로 냇물을 막았다가 터뜨려 적을 무찔렀고, 개경 가까이까지 왔다가 물러나는 거란군을 1019년 2월 귀주에서 크게 쳐부수었다. 살아 돌아간 적이 수천에 불과했다.
  • 강화 -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쓰고 사대 관계를 맺었으나 강동 6주를 지켰다. 고려·송·거란의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다.
  • 나성 - 강감찬의 건의로 개경 바깥에 나성을 쌓아 1029년 완성했다.
  • 천리장성 - 덕종·정종 때(1033~1044)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 도련포까지 쌓아 거란과 여진에 대비했다.

다른 대외 항쟁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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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상대·시기
서희의 외교 담판, 강동 6주 획득 거란 1차 침입(993)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입, 현종의 나주 피난 거란 2차 침입(1010)
강감찬의 귀주 대첩 거란 3차 침입(1019)
별무반 조직, 동북 9성 축조 여진 (→ 윤관)
김윤후의 처인성 전투, 강화 천도, 삼별초 항쟁 몽골 (→ 고려 몽골 전쟁)
만부교 사건 고려 태조 때(942) (→ 고려 태조)
  1. ↑ 구주대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2. ↑ 서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