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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姜邯贊, 948~1031)은 고려 현종 때의 문신으로, 1018년 거란의 3차 침입 때 상원수가 되어 이듬해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무찌르고(귀주 대첩), 개경에 나성을 쌓자고 건의했다.

강감찬 흉상(전쟁기념관)

처음 이름은 강은천(姜殷川)이고 금주(지금의 서울 관악·시흥 일대) 사람이다. 아버지 강궁진은 태조를 섬긴 삼한벽상공신이었다. 성종 때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해 예부시랑에 이르렀다. 『고려사』는 그가 몸집이 작고 얼굴이 볼품없으며 옷차림도 허름했으나, 조정에서 큰일을 결정할 때는 나라의 기둥이 되었다고 적었다. 어느 사신이 큰 별이 떨어진 집에서 그가 태어난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태어난 곳은 지금 서울 관악구의 낙성대로 알려져 있다.[1]

거란의 2차 침입과 남쪽 피난 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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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년(현종 1) 거란 성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서경을 공격하고 고려군이 패하자, 신하들은 항복을 의논했다. 강감찬은 홀로 "이번 일의 죄는 강조에게 있으니 걱정할 바가 아니다. 다만 적은 군사로 맞서기 어려우니 적의 기세를 피했다가 다시 일어날 길을 찾아야 한다"며 왕에게 남쪽으로 피난할 것을 권했다. 현종은 나주까지 피난했고, 뒤에 "그때 강공의 계책이 아니었다면 온 나라가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1] → 강조의 정변, 고려 거란 전쟁

1018년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군사로 쳐들어오자, 서북면행영도통사 강감찬이 상원수, 강민첨이 부원수가 되어 20만 8천여 명을 이끌었다.

  • 흥화진 - 기병 1만 2천을 산골짜기에 숨기고, 소가죽을 꿴 큰 줄로 냇물을 막았다가 적이 오자 터뜨려 크게 이겼다.
  • 개경 방어 - 거란군이 곧바로 개경으로 향하자 김종현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개경을 지키게 했다.
  • 귀주(1019년 2월) - 돌아가는 거란군을 귀주 동쪽 들판에서 맞아 싸웠는데, 김종현의 군대가 도착하고 남풍이 불자 크게 이겼다. 살아 돌아간 거란군이 수천에 불과했다고 한다.[2]

현종은 영파역까지 나와 금으로 만든 꽃 여덟 가지를 그의 머리에 꽂아 주었다. 이 싸움 뒤 거란과 고려 사이에 평화가 자리 잡았다. → 귀주 대첩

『고려사』 강감찬 열전은 1018년에 쳐들어온 거란 장수를 '소손녕'으로 적었으나, 『요사』와 백과사전은 소손녕의 형 소배압이라 한다. 993년 서희와 담판한 장수가 소손녕이다(→ 서희의 외교 담판).

나성 축조와 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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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은 도성에 성곽이 없다며 개경 나성을 쌓자고 건의했고, 현종은 왕가도에게 쌓게 해 1029년 완성했다. 1030년 문하시중에 올랐다가 이듬해 84세로 죽었고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낙도교거집』·『구선집』을 지었고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1]

거란·여진과의 싸움 인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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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활약
서희 993년 소손녕과 담판, 강동 6주 확보
양규 1010년 2차 침입 때 흥화진을 지키고 포로를 구출
강감찬 1019년 귀주 대첩, 개경 나성 건의
윤관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 정벌, 동북 9성 축조
김윤후 몽골 침입 때 처인성·충주성 전투
  1. ↑ 1.0 1.1 1.2 『고려사』 권94 열전7 강감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2. ↑ 강감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