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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景福宮)은 1395년(태조 4) 한양 백악산 아래에 세운 조선의 법궁(정궁)으로,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1867년(고종 4) 흥선 대원군의 주도로 다시 지어졌다.

경복궁 근정전

조선 건국 뒤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며 지은 첫 궁궐이다. 이름은 『시경』의 "군자 만년 그대의 큰 복(경복)을 도우리라"에서 두 글자를 따왔다. 처음에는 정전인 근정전과 침전인 강녕전 등 390여 칸 규모였다. 정문 광화문 앞으로 육조 거리가 펼쳐진 한양의 중심이었다.[1][2]

  • 경회루 - 태종이 연못을 넓게 파고 다시 지은 큰 누각으로, 임금과 신하가 잔치를 열고 사신을 맞았다. 파낸 흙으로 침전 뒤에 아미산을 만들었다.
  • 세종 때 - 궁 안에 집현전을 두고, 경회루 남쪽에 보루각, 서북쪽에 간의대, 강녕전 서쪽에 흠경각을 세웠다. 훈민정음도 이곳에서 창제·반포되었다(1446).[2]
  • 1553년(명종 8) 화재로 근정전 북쪽 전각 대부분이 탔다가 이듬해 복구했다.[1]
  • 임진왜란 -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270여 년 동안 폐허로 남았다. 단종이 쫓겨나고 조광조가 사약을 받은 곳이라 길하지 않다는 말도 있어, 전란 뒤에는 창덕궁을 다시 지어 법궁으로 썼다.
  • 중건 - 1865년(고종 2) 신정왕후의 명으로 흥선 대원군이 중건을 시작해 1867년 마쳤고, 고종은 1868년 경복궁으로 옮겼다. 7,225칸 반에 이르는 큰 규모였다(→ 경복궁 중건).[1]
  • 건청궁과 향원정 - 1873년(고종 10) 북쪽에 건청궁을 지었다. 건청궁 앞 연못 가운데 섬에는 육각형 2층 정자인 향원정이 있다. 1895년 건청궁 옥호루에서 명성 황후가 시해되었다(을미사변).[2]

일제 강점기와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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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년 국권을 빼앗긴 뒤 전각을 헐어 팔았고, 1915년 조선 물산 공진회를 연다며 많은 전각을 없앴다. 1926년 근정전 앞을 가로막는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지었고, 광화문은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다.
  • 1990년대부터 복원 공사를 벌여 조선 총독부 청사를 헐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995년, 궁능유적본부는 1995~1997년으로 적음), 흥례문·침전·건청궁·광화문 등을 되살렸다.[1][2]

서울의 궁궐과 제단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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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특징
경복궁 조선의 법궁, 근정전·경회루·향원정·건청궁
창덕궁 임진왜란 뒤 법궁, 후원의 주합루(1층 규장각)
덕수궁 옛 경운궁, 대한 제국의 궁궐, 정관헌·석조전·중명전
종묘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
환구단 고종이 황제에 즉위한 제단, 황궁우
  1. ↑ 1.0 1.1 1.2 1.3 경복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
  2. ↑ 2.0 2.1 2.2 2.3 경복궁 소개·역사, 궁능유적본부, 국가유산청,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