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메뉴 여닫기
환경 설정 메뉴 여닫기
개인 메뉴 여닫기
로그인하지 않음
지금 편집한다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될 수 있습니다.

계축옥사(癸丑獄事)는 1613년(광해군 5) 대북 세력이 서얼들의 강도 사건을 역모로 꾸며 영창 대군과 그 외할아버지 김제남을 죽이고 반대 세력을 몰아낸 옥사이다.

광해군은 선조의 서자이자 둘째 아들이었고, 선조 말년에 정비 인목 왕후에게서 적자 영창 대군이 태어나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 등 대북 세력은 영창 대군을 세우려 했다는 구실로 소북의 영수 유영경을 죽게 하고, 영창 대군 주변 세력을 없앨 기회를 엿보았다.[1]

  • 칠서의 옥 - 1613년 3월 문경 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빼앗은 강도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박응서·서양갑·심우영 등 명문가의 서자 일곱 명으로, 서얼 차별을 없애 달라고 상소했다가 거절당한 뒤 여주 강변에 모여 '강변칠우'라 일컫던 이들이었다. 그래서 이 사건을 칠서의 옥이라고도 한다.[1]
  • 역모 조작 - 이이첨 등은 박응서를 회유해 이들이 영창 대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자금을 모았다는 거짓 고변을 하게 했다. 서양갑도 고문 끝에 인목 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우두머리라고 거짓 자백했다.[1]
  • 결과 - 김제남은 사사되고, 영창 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갇혔다가 1614년 강화 부사 정항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덕형·이항복 등 서인과 남인이 귀양 가거나 쫓겨나 대북이 권력을 독차지했다.[1]
  • 폐모 - 이 옥사를 빌미로 인목 대비를 폐하자는 논의가 이어졌고, 1618년 대비는 존호를 빼앗기고 서궁(경운궁, 지금의 덕수궁)에 갇혔다.[2]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가둔 '폐모살제'는 1623년 서인이 인조반정을 일으키며 내세운 가장 큰 명분이 되었다. 반정 직후 『인조실록』에 실린 교서는 광해군이 영창 대군을 섬에 가두어 죽이고 김제남 집안을 멸했으며 대비를 서궁에 가두었다고 꾸짖었다. 반정 뒤 계축옥사는 대북이 권력을 쥐려고 강도범을 이용해 지어낸 무고한 옥사로 규정되었다.[2][1]

조선의 정변·옥사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건 때 내용
사육신 처형 1456년, 세조 단종 복위를 꾀한 성삼문 등 처형
갑자사화 1504년, 연산군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을 빌미로 숙청
기묘사화 1519년, 중종 위훈 삭제를 주장한 조광조 일파 제거
계축옥사 1613년, 광해군 영창 대군 살해, 뒤이어 인목 대비 유폐
이괄의 난 1624년, 인조 인조가 공주로 피란
  1. ↑ 1.0 1.1 1.2 1.3 1.4 계축옥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
  2. ↑ 2.0 2.1 『인조실록』 권1, 인조 1년 3월 13일, 인조 반정, 사료로 본 한국사,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