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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평성(廣評省)은 904년 궁예가 국호를 마진으로 고치면서 처음 둔 최고 정무 기구로, 여러 관부를 거느리고 나라의 정사를 총괄했으며 고려 초기까지 이어졌다.

궁예는 904년(신라 효공왕 8)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로 정하면서 신라의 제도를 본떠 여러 관직을 새로 두었다. 『삼국사기』 궁예 열전과 직관지는 이때 비로소 광평성을 두고, 장관 광치나(匡治奈, 고려의 시중에 해당), 차관 서사(徐事, 시랑), 실무 관원 외서(外書, 원외랑)를 두었다고 적었다.[1]

광평성 아래에 병부, 대룡부(창부), 수춘부(예부), 봉빈부(예빈성), 의형대(형부), 납화부(대부시), 조위부(삼사), 내봉성(도성), 금서성(비서성), 남상단(장작감), 수단(수부), 원봉성(한림원), 물장성(소부감) 등을 두어 일을 나누어 맡겼다. 괄호 안은 『삼국사기』가 견준 고려의 관청이다. 또 정광·원보·대상·원윤·좌윤·정조·보윤·군윤·중윤의 9관등을 새로 정했다. 이런 마진·태봉의 관제를 '광평성 체제'라 부른다.[1]

관부 이름 가운데 말을 기르는 관청을 『삼국사기』는 비룡성(飛龍省)으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비봉성(飛鳳省)으로 적어 서로 다르다.[2] 광평성은 신라의 집사성에 견주어지며, 그 관직 짜임(시중·시랑·원외랑)도 신라 집사성을 본뜬 것으로 본다. 광평성이 호족의 뜻을 모으는 기구였다는 견해와 왕 아래의 정부 기구였다는 견해가 있다.

고려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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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년 왕건이 즉위한 뒤에도 태봉의 제도를 그대로 이어 광평성이 백관을 거느렸고, 즉위하던 해 김행도를 광평시중으로 삼았다. 그러나 광종 때 내의성이 위로 올라서며 밀려났고, 성종 때 중국식 3성 6부제를 받아들이면서 바뀌었다.[3]

바뀐 과정은 기록마다 달리 전한다. 『고려사』 백관지는 982년(성종 1) 광평성을 어사도성으로 고치고 995년 상서도성으로 바꾸었다고 적었다. 한편 광평성이 내의성·내사성과 합쳐져 982년 내사문하성이 되고, 1061년(문종 15) 중서문하성으로 바뀌었다고 보는 정리도 있다.[3]

후삼국 시대의 기구·정책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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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물·나라
광평성을 비롯한 여러 정치 기구를 마련, 철원 천도, 국호 태봉 궁예(마진·태봉)
오월에 사신을 보내 검교태보의 직을 받음 견훤(후백제)
고려에 항복한 뒤 경주의 사심관이 됨 경순왕
12목에 지방관을 처음 파견 성종 (고려)
폐정 개혁을 목표로 정치도감 설치 충목왕 (→ 정치도감)
  1. ↑ 1.0 1.1 『삼국사기』 권40 잡지 직관 하, 후고구려 관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 같은 내용이 권12 신라본기 효공왕 8년(904) 궁예가 백관을 설치하고 국호와 연호를 제정하다의 주석에 인용되어 있다.
  2. ↑ 광평성(태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
  3. ↑ 3.0 3.1 광평성(고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