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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成宗, 960~997, 재위 981~997)은 고려의 제6대 왕으로,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12목에 처음 지방관을 보내고 중앙 관제를 중국식으로 갖추는 등 유교 이념에 따라 고려 국가 체제의 기틀을 세웠다.

이름은 왕치(王治)이다. 태조의 손자로, 사촌 형 경종의 선양을 받아 즉위했다. 즉위하자 5품 이상의 관리에게 정치의 잘잘못을 적어 올리게 했고, 이때 최승로가 올린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개혁의 방향으로 삼았다. 광종이 숙청으로 호족을 눌렀다면 성종은 제도를 갖추어 지방과 중앙을 국왕 중심으로 묶었다는 점에서 평가된다. 993년 거란이 침입하자 서희를 보내 외교 담판으로 물리치고 강동 6주를 얻었다. 997년 병이 깊어지자 조카 왕송(목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1]

지방 제도 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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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목 설치(983) - 전국의 요충지 12곳에 목을 두고 처음으로 지방관(목사)을 보냈다. 고려 건국 뒤 처음 있는 상주 지방관 파견이다. 이전까지 조세를 거두던 임시 관리인 금유·조장은 없앴다.
  • 향리 제도 개편(983) - 지방 호족이 쓰던 관직 이름을 바꾸어 당대등은 호장, 대등은 부호장으로 고치고, 병부는 사병, 창부는 사창으로 낮추어 중앙 관청과 구별했다. 이로써 호족이 향리로 편입되었다.
  • 경학박사·의학박사 파견(987) - 12목에 박사를 한 명씩 보내 지방 자제를 가르치게 했다.
  • 10도와 12주 절도사(995) - 당의 제도를 본떠 전국을 10도로 나누고, 12목을 12주 절도사 체제로 바꾸었다. 10도는 곧 유명무실해졌으나 우리나라 도제의 시작으로 본다. 뒤에 현종이 이를 5도 양계로 정비했다(→ 고려의 지방 행정 제도).

중앙 관제와 유교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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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성 6부 - 982~983년 당의 3성 6부제를 받아들여 내사문하성·어사도성과 그 아래 6관을 두었고, 995년 6부로 고쳐 고려 중앙 관제의 기본 틀을 이루었다. 왕명 출납과 숙위를 맡은 중추원, 감찰을 맡은 어사대도 이때 갖추었다.
  • 국자감 설치(992) - 개경에 최고 교육 기관인 국자감을 세웠다.
  • 연등회·팔관회 축소 - 유교 정치를 내세우며 불교·토속 행사인 연등회와 팔관회를 중단했다(현종 때 다시 열었다).
  • 문신월과법 - 문신에게 매달 시와 글을 지어 바치게 해 학문을 권장했다.

경제·사회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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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창(986) - 태조가 둔 흑창을 넓혀 의창으로 고쳤다.
  • 상평창(993) - 개경·서경과 12목에 두어 곡식값을 조절했다. → 고려의 사회 제도
  • 건원중보(996) - 우리나라 최초의 철전(쇠돈)을 만들었으나 널리 쓰이지 못했다. → 고려의 경제

고려 초 왕들의 정책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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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왕
12목에 지방관 파견, 향리 제도 개편, 국자감 설치, 의창·상평창, 건원중보 성종
역분전, 흑창, 사심관·기인 제도, 『정계』·『계백료서』 태조
광군 조직과 광군사 설치(947), 서경 천도 추진 정종 (→ 고려의 군사 제도)
노비안검법, 과거제(쌍기), 공복 제정 광종
5도 양계 정비, 초조대장경 조판 시작 현종
국학 7재, 양현고, 감무 파견 예종
  1. ↑ 성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