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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옥사(己丑獄事, 1589)는 1589년(선조 22) 10월 정여립이 모반을 꾀한다는 고변에서 시작되어 3년 가까이 이어지며 이발 등 동인 1,000여 명이 처형되거나 유배된 옥사로, '정여립 모반 사건'이라고도 한다.

정여립(1546~1589)은 전주 사람으로, 본래 이이·성혼의 아낌을 받던 서인이었으나 이이가 죽은 뒤 집권 동인 편에 서서 이이를 비판했다. 선조의 미움을 사 벼슬을 버리고 전라도로 내려간 그는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짓고 '대동계'를 만들어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모아 활쏘기를 익혔다. 1587년 왜구가 전라도에 쳐들어오자 대동계를 동원해 물리치기도 했다.[1]

1589년 10월 2일 황해도 관찰사의 비밀 장계가 올라왔다. 안악 군수 이축, 재령 군수 박충간, 신천 군수 한응인 등이 정여립이 한강이 어는 때를 틈타 황해도와 호남에서 한꺼번에 서울로 쳐들어오려 한다고 고변한 것이다. 선조가 의금부 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로 보내자 정여립은 아들 정옥남과 진안 죽도로 달아났다가 관군에 둘러싸이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자결로 역모는 사실로 굳어졌다.[1]

서인 정철이 위관(재판장)을 맡아 옥사를 넓혔다. 동인의 영수 이발과 이길 형제, 정언신·백유양 등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고, 이발은 늙은 어머니와 어린 아들까지 화를 입었다. 이어 호남 유생들의 상소로 정개청 등 30여 명이 연루되었고, 진주의 처사 최영경은 역모의 주모자 '길삼봉'으로 몰려 옥중에서 죽었다.[2]

  • 붕당의 갈등 심화 - 옥사의 책임을 둘러싼 다툼은 뒤에 붕당 사이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다시 불려 나왔다. 1591년 건저의 사건으로 정철이 물러난 뒤 동인은 서인 처벌을 두고 강경한 북인과 온건한 남인으로 갈라졌다(→ 선조 (조선)).
  • 호남 차별 - 전라도는 반역의 고장(반역향)으로 불리게 되었고, 호남 사림 사이의 반목이 오래 이어졌다.[2]
  • 원인을 보는 견해 - 서인의 배후 송익필이 자신을 다시 노비로 만들려던 동인에게 보복했다는 설, 정철이 서인 세력을 회복하려고 옥사를 키웠다는 설, 왕위는 세습할 것이 아니라는 정여립의 주장이 실제로 문제가 되었다는 설, 선조가 커진 동인을 견제하려 키웠다는 설 등이 맞선다.[2]

조선 전기의 사화·옥사와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건 때 내용
을사사화 1545(명종 즉위년) 소윤 윤원형이 대윤 윤임 일파를 제거
양재역 벽서 사건 1547(명종 2) 문정 왕후 비난 벽서를 빌미로 이언적 등 유배
기축옥사 1589(선조 22) 정여립 모반 고변, 이발 등 동인 대거 처벌
건저의 사건 1591(선조 24) 세자 책봉 건의로 정철 유배, 동인의 남북 분열
인조반정 1623(광해군 15) 서인이 광해군과 북인을 몰아냄
  1. ↑ 1.0 1.1 정여립 모반 사건, 사료로 본 한국사,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
  2. ↑ 2.0 2.1 2.2 기축옥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