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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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 대첩(幸州大捷)은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2월 12일 전라도 관찰사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이 한강 가의 행주산성에서 3만여 명의 일본군을 크게 물리친 싸움이다.

1593년 1월 조명 연합군이 평양을 되찾자 일본군은 한양으로 물러나 모였다. 권율은 명군과 함께 한양을 되찾으려고 북상하다가 수원 독산성에서 일본군을 물리쳤고, 이어 한양 서쪽 근교로 옮겨 조방장 조경이 고른 행주산성에 목책을 세우고 진을 쳤다. 전라도 병사 선거이는 4,000명을 이끌고 금천(지금의 시흥)에, 소모사 변이중은 양천에 머물며 바깥에서 거들었다. 승장 처영이 이끄는 승병 1,000명도 합류해 성 안의 병력은 1만 명이 채 안 되었다.[1]
- 일본군의 공격 - 벽제관에서 명군을 이긴 일본군은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를 비롯해 고니시 유키나가·이시다 미쓰나리·구로다 나가마사 등이 7개 부대로 나뉘어 3만여 명이 몰려왔다. 2월 12일 새벽부터 해 질 무렵까지 차례로 성을 공격했다.[1]
- 조선군의 방어 - 성책을 안팎 두 겹으로 둘렀고, 변이중이 만든 화차, 수차석포, 진천뢰·총통 같은 화약 무기와 활로 맞섰다. 우키타와 이시다 등 대장들이 다쳐 물러났다. 한때 승병이 지키던 곳이 뚫릴 위기도 있었으나 권율이 칼을 빼 들고 독려해 백병전으로 막아 냈다.[1]
- 승리 - 화살이 떨어질 즈음 경기 수사 이빈이 화살 수만 개를 배에 싣고 와 일본군은 물러갔다. 일본군은 시체를 불태우며 달아났고 조선군은 130여 급을 베었다.[2]
- 행주치마 -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입고 돌을 날라 싸움을 도왔고, 여기서 '행주치마'라는 말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1]
행주 대첩은 한산도 대첩, 제1차 진주성 전투와 함께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힌다. 한양의 일본군은 더 버티기 어려워져 그해 4월 한양에서 물러났다. 명의 경략 송응창이 권율을 포상했고, 권율은 뒤에 도원수가 되었다(→ 임진왜란).[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