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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진흥 운동(農村振興運動, 1932~1940)은 1930년대 초 농업 공황으로 농촌이 무너지고 소작 쟁의가 거세지자, 조선 총독부가 농민의 '자력갱생'을 내세워 위로부터 벌인 관제 농촌 운동이다.

1929년 세계 대공황에 이어 쌀값을 비롯한 농산물 값이 크게 떨어지자, 산미 증식 계획으로 수리 조합비와 비료 대금 부담을 떠안았던 한국 농민은 빚에 몰리고 봄철마다 식량이 떨어지는 '춘궁'에 시달렸다. 소작 쟁의와 혁명적 농민 조합 운동이 번지자 총독부는 농촌을 다시 장악할 필요를 느꼈다. 1932년 총독부는 농촌 진흥 운동을 시작해 농민이 근검절약하고 부지런히 일하면 스스로 살아날 수 있다고 선전했다. 가난의 원인을 식민지 지주제와 수탈이 아니라 농민 개인의 게으름과 낭비에서 찾은 것이다.[1]

  • 초기(1932~1935) - 군·면·마을마다 농촌 진흥 위원회와 진흥회를 두고, 대상 농가를 골라 '농가 갱생 계획'을 세우게 했다. 집집마다 식량 자급, 현금 수지 균형, 빚 갚기를 목표로 삼아 가마니 짜기 같은 부업과 절미·금주·금연을 권했다.
  • 확충기(1935~1937) - 갱생 계획을 세우는 농가와 마을을 더 넓혀 운동을 확대했다.
  • 전시 체제기(1937~1940) - 중일 전쟁 뒤에는 증산과 공출, 전시 동원을 위한 운동으로 바뀌었고, 1940년 국민 총력 운동에 흡수되었다.[1]
  • 농촌 통제 - 마을마다 둔 농촌 진흥회가 식민 권력과 마을을 잇는 통로가 되어, 총독부의 지시가 농가 하나하나에까지 닿게 되었다. 이 조직은 뒤에 전시 동원의 말단 조직으로 쓰였다.[1]
  • 민족 운동 흡수 - 총독부는 '부락 진흥회'를 만들고 관제 간행물·강연·야학을 펼쳐, 언론사와 학생들이 벌이던 농촌 계몽 운동을 흡수하고 그 민족적 성격을 흐리려 했다.[2]
  • 한계 - 지주제와 높은 소작료는 그대로 둔 채 농민의 노력만 강조했기 때문에 농가 경제는 나아지지 않았다. 같은 시기 총독부는 남면북양 정책으로 남부에는 면화, 북부에는 양 기르기를 할당해 농민의 부담을 더했다.

일제의 농업·경제 정책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정책·운동 시기 내용
토지 조사 사업 1910~1918 기한부 신고제, 총독부의 국유지 확대
산미 증식 계획 1920~1934 일본으로 쌀 반출 증가, 수리 조합비 부담
농촌 진흥 운동 1932~1940 자력갱생, 농가 갱생 계획, 관제 농촌 통제
남면북양 정책 1930년대 남부 면화 재배, 북부 양 사육 강요
브나로드 운동 1931~1934 동아일보가 이끈 학생 농촌 계몽 운동(민간)
국가 총동원법 1938 전시 인력·물자 동원
  1. ↑ 1.0 1.1 1.2 김영희, 「농촌진흥운동을 통한 일제의 농촌통제와 농민의 반응」,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0,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2, 297~342쪽, 2026-10-19 확인.
  2. ↑ 농촌계몽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