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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법(永定法)은 조선 인조 때 풍년과 흉년을 따져 전세를 달리 매기던 연분 9등법을 그만두고, 토지 1결당 전세를 대체로 쌀 4~6두로 고정한 전세 제도로, 정식 이름은 영정과율법(永定課率法)이다.

세종 때 만든 공법은 토지의 비옥도를 6등급(전분 6등법), 그해의 풍흉을 9등급(연분 9등법)으로 나누어 모두 54단계로 세금을 매겼다. 판정이 복잡하고 세율도 높아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고, 15세기 말부터는 풍흉과 관계없이 가장 낮은 세율에 가까운 쌀 4~6두를 걷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1]

임진왜란 뒤 토지 대장이 흐트러지고 농민 생활이 어려워지자, 인조 정부는 1634년(인조 12) 삼남 지방에 양전(토지 측량)을 실시하고 새 전세 수취 방식을 정했다. 『신편 한국사』는 영정법을 인조 12년(1634)에 정한 것으로 보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635년(인조 13)에 제정한 것으로 적어 1년 차이가 난다.[2][1]

  • 풍흉에 관계없이 고정 - 해마다 풍흉을 따지던 연분 9등법을 없애고 토지 등급에 따라 세액을 고정했다.
  • 9등급 세액 - 상상전 20두에서 하하전 4두까지 2두씩 차이를 두었다. 다만 경상도는 상하전(16두), 전라도·충청도는 중중전(12두)을 최고로 하고 나머지 5도는 모두 하하전 4두로 했다.[1]
  • 실제 부담 - 대부분의 땅이 하중전·하하전으로 매겨져 전세는 대체로 4~6두였다. 연분 9등법의 '하지하'(가장 낮은 등급) 세액인 4두로 사실상 정액화한 셈이다.[2]

전세는 줄었지만 땅에는 대동미(1결당 12두), 삼수미(2두), 뒤의 결작(2두)과 여러 수수료·운송비가 덧붙었다. 지주는 이를 소작농에게 떠넘기기 일쑤였고, 결부법과 전분 등급이 그대로 남아 거두는 과정의 폐단도 사라지지 않았다. 1760년(영조 36)에는 영정법을 바탕으로 도별 총액을 정해 거두는 비총법이 시행되었다.[1][2]

조선 후기 수취 제도 개편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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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 대상 때 핵심
영정법 전세(토지세) 인조(1634~1635) 풍흉과 관계없이 1결당 4~6두로 고정
대동법 공납(특산물) 1608 경기 ~ 1708 황해 특산물 대신 토지 1결당 쌀 12두 등을 걷고, 관청 물품은 공인이 조달
균역법 군역(군포) 영조(1750) 군포 2필을 1필로 줄이고 결작·선무군관포 등으로 보충
직전법 관리의 수조권 세조(1466)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지를 줌 (→ 조선 전기의 토지 제도)
전시과 관리의 수조권 고려(976~1076) 관직·직역에 따라 전지와 시지를 나누어 줌
  1. ↑ 1.0 1.1 1.2 1.3 영정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2.0 2.1 2.2 전정의 부실, 『신편 한국사』 32 조선 후기의 정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