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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법(貢法)은 조선 세종 때 오랜 논의 끝에 1444년(세종 26) 확정한 전세 제도로,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6등급(전분 6등법), 그해 농사의 풍흉에 따라 9등급(연분 9등법)으로 나누어 1결당 20두에서 4두까지 거두게 했다.

고려 말 과전법 이래 전세는 관리가 해마다 논밭에 나가 작황을 조사해 손실을 덜어 주는 손실답험법으로 거두었다. 그러나 조사하는 관리의 자의와 부정이 끼어들기 쉬웠다. 세종은 즉위 초부터 일정한 액수를 거두는 공법을 구상했고, 1427년(세종 9) 과거 시험 문제로 이를 처음 공식적으로 내놓았다.[1]

  • 여론 조사(1430) - 1결에 10두를 거두자는 호조의 안을 놓고 관리와 백성의 의견을 물었다. 찬성 98,657명, 반대 74,149명이었다. 경상·전라도는 찬성이, 함길·평안도는 반대가 압도적이었고 고위 관료 다수는 반대했다.[1]
  • 시험 시행 - 1436년 공법을 전담할 기구를 두고, 1437년 상정공법을 세웠으나 반대에 부딪혀 멈추었다. 1438~1439년 경상·전라도, 이어 충청도에서 먼저 시험했다.[1]
  • 확정(1444) - 1443년의 개정안을 거쳐 1444년 결부제에 따른 전분 6등, 연분 9등의 공법을 확정했다.[1]
  • 전분 6등법 -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고, 등급에 따라 1결의 넓이를 달리했다.
  • 연분 9등법 - 그해 작황을 상상년부터 하하년까지 9등급으로 나누어 1결당 20두에서 4두까지 등급마다 2두씩 차이를 두었다. 전분 6등과 합쳐 모두 54등급으로 세금을 매겼다.[2]
  • 세율 - 수확의 20분의 1로, 1결 최고 30두이던 손실답험법(10분의 1)보다 낮았다. 다만 기준 생산량을 높게 잡아 실제 부담은 오히려 커졌다는 지적도 있다.[1]

해마다 작황을 직접 조사하기 어려웠고, 담당 관리가 대개 가장 낮은 등급을 매겨 세액은 하하년 기준인 1결당 4두로 굳어 가는 경향을 보였다.[2] 연분 9등법이 기준 노릇을 못 하게 되자 인조 때 풍흉과 관계없이 전세를 1결당 4~6두로 고정한 영정법이 나왔다.

공법을 전담한 전제상정소를 『신편 한국사』는 1436년(세종 18) 두었다고 적고, 우리역사넷 연대기는 1443년(세종 25)에 두었다고 적는다.[1][3]

조선의 수취 제도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제도 때 내용
공법(전분 6등·연분 9등) 1444년, 세종 비옥도와 풍흉에 따라 1결 20~4두
영정법 1635년, 인조 풍흉과 관계없이 1결 4~6두
대동법 1608년~, 광해군 이후 공물을 토지 결수에 따라 쌀·베·돈으로
균역법 1750년, 영조 군포 2필 → 1필, 결작·선무군관포로 보충
설점수세제 17세기 중엽 민간의 광산 채굴을 허용하고 세금을 거둠
  1. ↑ 1.0 1.1 1.2 1.3 1.4 1.5 공법 전세제로의 개편, 『신편 한국사』 24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
  2. ↑ 2.0 2.1 연분9등법, 교과서 용어 해설,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
  3. ↑ 공법의 실시,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