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 (실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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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李瀷, 1681~1763)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평생 벼슬하지 않고 경기도 안산 첨성리에 머물며 『성호사설』·『곽우록』을 지어 한전론과 나라를 좀먹는 여섯 가지 폐단(육두)을 주장했고, 그의 학문을 이은 성호학파가 정약용에게까지 이어졌다. 호는 성호(星湖)이다.

아버지 이하진이 1680년 경신환국 때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되었는데, 이익은 1681년 그 유배지에서 태어났다. 1705년 증광시에 응했으나 회시에 나가지 못했고, 이듬해 둘째 형 이잠이 장희빈을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역적으로 몰려 매를 맞다 죽자 과거를 단념했다. 이후 안산 첨성리에 칩거하며 아버지가 청에서 사 온 수천 권의 책을 바탕으로 학문에만 힘썼다. 그곳의 호수 이름을 따서 호를 성호라 했다.[1]
- 한전론 - 한 집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땅을 정해 영업전으로 삼고, 영업전은 사고팔지 못하게 하되 그 밖의 땅만 매매를 허용하자고 했다. 땅을 빼앗거나 새로 나누어 주지 않아도 세대가 지나면 토지 소유가 점차 고르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1]
- 여섯 좀(육두) - 『성호사설』 인사문 「육두(六蠹)」에서 나라를 망치는 여섯 가지 좀으로 노비 제도, 과거 제도, 양반 문벌, 사치와 기교, 승려, 게으름을 꼽았다. 상업은 물자를 통하게 하는 쓸모가 있다며 여섯 가지에 넣지 않았다.[2]
- 붕당론 - 붕당은 이익(利)을 두고 다투는 데서 생기며, 관직은 적은데 차지하려는 사람이 많아 갈라진다고 보았다. 그래서 과거 제도를 고치고 양반도 농사에 종사해야 한다(사농합일)고 했다.
- 화폐관 - 화폐가 고리대와 사치를 부추겨 농촌을 해친다며 돈을 없애자는 폐전론을 폈다. 농업을 근본으로 여긴 중농적 실학자의 면모이다.
- 역사관·서학 - 역사는 옳고 그름보다 그때의 형세(시세)를 먼저 보아야 한다고 했다. 서학서와 세계 지도를 읽어 중국 중심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시야를 가졌으나, 천주교 신앙은 받아들이지 않았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