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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仁宗, 1109~1146, 재위 1122~1146)은 고려의 제17대 왕으로, 재위 중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겪었으며 국자감의 경사 6학을 정비하고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했다.

인종의 능에서 나온 청자 참외 모양 병

예종의 맏아들로, 1122년 외할아버지 이자겸 등의 후원으로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이자겸은 두 딸을 인종의 왕비로 들이며 권력을 쥐었고, 1126년(인종 4) 인종이 그를 없애려 하자 척준경과 함께 궁궐을 불태우며 난을 일으켰다. 인종은 최사전을 시켜 척준경을 돌려세워 이자겸을 영광으로 귀양 보냈고, 이듬해 척준경도 내쫓았다(→ 이자겸의 난). 같은 해 백관을 모아 논의한 끝에 금에 사대하기로 했다.[1]

서경 천도 운동과 묘청의 난

편집 원본 편집
  • 이자겸의 난으로 개경 궁궐이 불타고 민심이 흔들리자, 묘청·백수한·정지상 등이 서경(평양)의 땅 기운이 좋다는 서경길지설을 내세웠다. 인종은 이에 공감해 1128년(인종 6) 서경 임원역에 대화궁을 짓고, 1131년 그 안에 팔성당을 두었다.
  • 묘청 등은 서경 천도와 함께 왕을 황제라 부르고 독자 연호를 쓰자는 칭제 건원, 금을 치자는 금국 정벌을 주장했으나 김부식 등 개경 세력의 반대로 막혔다.
  • 1135년(인종 13) 묘청이 서경에서 국호를 대위라 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김부식을 원수로 삼아 이듬해 진압했다(→ 묘청의 난).[1]
  • 경사 6학 - 식목도감에서 학식을 정해 국자감의 국자학은 3품 이상, 태학은 5품 이상, 사문학은 7품 이상 관리의 자손이 들어가게 하고, 율학·서학·산학을 아울러 경사 6학 체제를 갖추었다.
  • 향학 - 1127년(인종 5) 여러 주현에 학교를 세우게 해 지방 자제의 교육을 넓혔다.
  • 서적소 - 1129년 서적소를 두고 학사들과 경서를 강론했다.
  • 무학재 폐지 - 1133년(인종 11) 정월, 무학재 생도는 과거에 응시하는 자가 적어 책론이 합격 수준에 못 미쳐도 뽑아 주므로 급제가 너무 쉽고, 무학이 커지면 문학 하는 이들과 맞서 화합하지 못할 것이라며 무학으로 선비를 뽑는 일과 무학재의 이름을 모두 없앴다. 예종이 1109년 국학 7재의 하나로 두었던 강예재가 이로써 사라졌다.[2]
  • 『삼국사기』 - 묘청의 난을 진압한 뒤 김부식 등에게 명해 기전체 역사서 50권을 엮게 했고, 1145년(인종 23) 완성되었다(→ 삼국사기).

1146년 세상을 떠나 개성 서쪽 장단의 장릉에 묻혔다. 이 능에서 '황통 6년(1146)'이라는 연도가 적힌 책과 함께 12세기 전기 비색 청자의 대표작인 청자 참외 모양 병이 나왔다.[3] (→ 고려청자)

고려 중기 왕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실 왕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경사 6학, 무학재 폐지, 『삼국사기』 편찬 인종
별무반으로 여진 정벌·동북 9성, 국학 7재·양현고, 혜민국 설치 예종
주전도감을 두어 해동통보 주조, 별무반 조직 숙종
무신 정변(1170)으로 쫓겨남 의종 (→ 무신 정변)
  1. ↑ 1.0 1.1 인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
  2. ↑ 『고려사』 권74 지28 선거2 학교 국학, 인종 11년 정월, 무학재를 폐지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
  3. ↑ 국보 청자 참외 모양 병,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2026-10-21 확인.